23. ‘외국인’ 혐오의 민낯

– 타인을 구분하는 순간 벌어지는 일

by 한자루




“여기 사람 맞아?” “왜 저렇게 생겼지?” “말이 안 통하면 그냥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야지.”

이건 인터넷 뉴스 댓글이 아니다.
지하철 안에서, 편의점 앞에서, 음식점 홀이나 부동산 상담 창구에서 매일같이, 아무렇지 않게 공기처럼 흘러나오는 말들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한 사람을 ‘외국인’이라 부른다.

그 단어 하나로 그 사람은 더 이상 이곳의 일부가 아니라, 여기 있어도 ‘밖에 있는 사람’이 된다.

외국인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말 뒤에 숨겨진 기대와 조건이 문제다.

그들은 우리말을 매끄럽게 해야 하고, 문화를 잘 따라야 하며, 불편을 주지 말아야 하고, 되도록 한국인처럼 행동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상한 외국인’, ‘문제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때부터 혐오와 배제는 논리처럼 작동한다.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외국인’이라는 한 단어면 충분하다.

범죄가 일어났다? “외국인이라 그랬대.” 거리에서 싸움이 있었다? “외국인 무리였지 뭐.” 일터에서 갈등이 생겼다? “외국인 노동자 때문에 시끄러워.”

이 사회는 너무도 자주 개인을 지우고, 국적을 남긴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저 ‘어디서 왔는가’가 문제의 원인처럼 소비된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사람을 전체 집단으로 환원시키고, 개인의 사연은 ‘정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묵살해 버린다.

‘우리’라는 말은 따뜻하다. 공동체의 언어이고, 소속감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 말이 커질수록, ‘그들’은 더 멀어진다. 우리는 비슷한 말투를 쓰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뉴스를 소비한다.

그 공통점은 심리적 안정을 준다.

그러나 바로 그 안심이 다름에 대한 불편함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발음이 어색하면 웃고, 인사를 다르게 하면 경계하며, 관습이 다르면 몰상식이라 여긴다.

다름은 틀림으로 해석되고, 그 사람은 어느새 ‘이상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혐오는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그건 일상에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깔려 있다.

말이 느리다고 고객 응대를 건너뛰는 일, 줄 서 있는 사람을 ‘못 본 척’하고 순서를 넘기는 일, 대화 시도조차 포기한 채, “못 알아듣잖아”라고 말하는 일


이건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무시가 반복될 때, 그들은 이 사회에서 존재를 ‘입증’해야만 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다문화 사회’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묻는다. “외국인은 언제 돌아가나?”

하지만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거다.
“왜 우리는 그들을 아직도 ‘바깥사람’으로 보는가?”

그들은 이 거리를 걷고, 이 도시의 숨결을 마시고, 우리와 같은 시간 속을 살아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말한다.

“여기 사람 같지 않아.”

그 말의 무게는 그들을 향해 던져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좁아진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외국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이 도시의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고,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나는 문제없습니다.”

이건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가 만든 구조의 책임이다.

우리는 자꾸만 경계선을 긋는다. 그러나 경계선은 세상을 더 안전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고립시키고, 더 멀어지게 만든다.

다름을 멀리하는 사회는 결국 자기 자신조차 구석에 몰아넣는다.
‘우리’는 그렇게 강한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없으면, 그건 그저 배제의 구실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 배워야 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고, 외부자는 이미 안에 있으며, 누구도 이 사회에 존재를 입증할 의무는 없다.

서로의 삶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거창한 이념도, 제도도 아니다.
지하철 한 칸 안에서, 창구 너머에서, 음식점의 작은 웃음 속에서 시작되는 작은 존중이다.

다름은 불편함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을 꺼버리는 것은 그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손해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왜 아직도, 그들을 ‘여기 사람’으로 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