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계속 감시당한다고 느끼는가
지하철 안이었다.
옆자리의 아이가 칭얼거리고 있었다. 괜히 눈이 마주쳤다.
무심코 웃어주려다 멈췄다.
혹시 부모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횡단보도 앞에서는 한 노인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길을 묻고 싶은 듯했지만,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몇 걸음 물러났다.
돕고 싶었지만, 손을 내밀 수 없었다.
나는 자꾸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내 행동이 어떤 오해를 부를지.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허락을 받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도와주지 않았고, 말을 걸지 않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날, 나는 나를 실망시켰다.
우리는 지금 감시받는 존재로 살아간다.
카메라가 없을 때조차,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를 끊임없이 채점한다.
이 시대의 시선은 따뜻하지 않다.
의심과 거리두기의 필터를 통해 모든 행동을 분석하고 분류한다.
의도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너무 쉽게 던져지고, 그 질문 하나로 누군가의 선의는 금세 뒤틀려버린다.
아이에게 말을 건다? 이건 불순한 의도로 몰릴 수 있으며 여성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스토킹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 노인을 부축한다? 요즘 노인 대상 사기꾼 많다는 편견이 목을 조여온다.
사람을 향한 접근조차 사회적 범죄와 연결되는 사회.
이제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은 계획과 전략이 필요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순간의 따뜻함이 아니라 신중한 계산이 필요한 시대다.
문제는 ‘이상함’의 기준이 너무 얄팍하다는 것이다.
표정이 좀 어색하다, 말투가 부자연스럽다,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다, 혼자 있고 조용하다.
그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한마디.
“쟤, 좀 이상하지 않아?”
그 말은 언제부턴가 피해 예방 행동으로 포장되었고, 누군가를 미리 차단하는 것이 ‘현명한 자기 방어’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웠다.
“가만히 있는 게 제일 안전하다.”
“괜히 나섰다가는 손해 본다.”
“모르는 사람이 말 거는 건 다 수상한 거야.”
그 조언들은 겉으로 보기엔 나를 지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말들은 우리 모두를 불신의 감옥에 가둔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다. 우리는 타인과 마주하고, 관찰하고, 공감하고, 도우며 살아간다.
하지만 지금 이 구조는, 그 본능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선의는 조심해야 할 감정이 되었고, 도움은 ‘오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 되었다.
자기검열은 일상이 되었고, 우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를 줄여간다.
이건 단순히 개인의 문제도, 개별 사건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신뢰보다 의심을 먼저 가르치는 사회, 따뜻한 관심보다 거리를 먼저 강조하는 사회, 우리가 만든 이 구조는
우리 각자에게 잠재적 가해자의 그림자를 씌운다.
그래서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면, “왜?” “뭐 때문에?” “뭘 노리는 거야?” 라는 질문부터 튀어나온다.
이 사회는 친절한 사람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는 선의보다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정말 안전할까?
진짜 위험은 이상한 사람이 있는 사회가 아니라, 아무도 나서지 않는 사회에서 더 자라난다.
그곳에서는 피해를 당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고통을 말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묻고 행동해야 한다. 이 사회는 정말 건강한가? 내가 오늘 접은 친절은, 정말 내 의지였는가?
아니면 감시의 결과였는가?
다시 묻는다. 나는 오늘, 어떤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
친절은 선택이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그 당연함조차 의심해야 한다면, 이미 사회는 병들고 있다.
이상한 사람을 걱정하기 전에, ‘이상하게 보일까 봐’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 세상을 우리는 더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