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먼지 하나 없는 제국을 만드는 법

리콴유 (Lee Kuan Yew)

by 한자루
출생 : 1923.09.16. 싱가포르
사망 : 2015.03.23.
가족 : 배우자 콰 걱추, 아들 리센룽
학력 : 케임브리지대학교 법학 학사
경력 : 2004~2011.05. 싱가포르 고문장관
1990.11.~2004 싱가포르 선임장관
1965.08.~1990.11. 싱가포르 총리
1963.09. 싱가포르 주정부 총리


리콴유의 이야기는 1920년대 싱가포르의 한 부유한 객가인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부터 이미 '글로벌'한 야심을 품었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해리 리(Harry Lee)'. 이름만 들으면 런던의 안개 낀 거리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파이프를 물고 있을 법한 이 소년은, 실제로 런던 정경대(LSE)와 케임브리지로 건너가 영국식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하지만 그는 영국에서 민주주의의 숭고함보다 '서구식 무질서의 비효율성'을 먼저 목격했다.

런던의 껌 자국 가득한 거리와 히피들의 자유분방함을 보며, 이 깐깐한 동양 청년은 아마도 남모를 결벽증을 키웠을 것이다.

'법이란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니라, 통치하기 위해 설계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런던의 도서관에서 깨달은 해리는 고향으로 돌아와 칼 대신 '행정'이라는 전지가위를 든 정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1959년 초대 총리가 된 그에게 운명은 가혹한 농담을 던졌다.

1965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국가가 독립을 구걸하는 경우는 많아도, 독립을 당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역사상 유례가 드물다. 리콴유는 TV 카메라 앞에서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쳤다.

국제 정세라는 막장 드라마에서 갑자기 집 밖으로 쫓겨난 비련의 주인공 같았다.

천연자원이라고는 고작 '사람'밖에 없고, 마실 물조차 말레이시아에서 사 와야 하는 이 좁은 섬 동네를 두고 사람들은 조롱했다.

"저기는 나라가 아니라 큰 공장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리콴유는 눈물을 닦자마자 '국가 시뮬레이션 게임'의 전원을 켰다.

그는 국가를 경영한 게 아니라, 싱가포르라는 이름의 기업을 창업한 CEO였다.

그는 "나는 독재자가 아니다. 단지 실수가 없는 리더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마치 수험생이 "나는 커닝을 한 게 아니라, 정답지를 미리 제작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고도의 뻔뻔함이었다.


국제 언론은 늘 싱가포르를 보며 인지부조화에 빠졌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데 왜 폭동이 안 일어나지?" 리콴유의 해답은 간단했다.

"자유는 밥 먹여주지 않지만, 에어컨과 깨끗한 집은 밥맛을 좋게 한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으로 주저 없이 '에어컨'을 꼽았다.

열대 지방의 인간들은 더위에 나태해지기 쉬우니, 북극의 한기를 유지하는 사무실에 몰아넣고 긴장시켜야 효율이 나온다는 지론이었다.

실제로 싱가포르의 모든 공공기관은 리콴유의 취향에 따라 살벌한 냉방을 유지한다.

국민의 사상뿐만 아니라 '체온'까지 통제하고 싶어 했던 이 시스템 엔지니어는, 국민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조금 내놓으면, 대신 스위스 같은 통장 잔고와 범죄 없는 밤거리를 주겠다"는 악마의 계약을 제안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기꺼이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리콴유의 통치 철학은 '결벽증적 유토피아'였다.

그는 국민의 입에 민주주의라는 사탕 대신 '청결'이라는 칫솔을 강제로 물려주었다.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껌을 씹는 행위 자체를 범죄화했다.

지하철 문에 껌을 붙여 연착시키는 행위는 그의 정밀한 시스템에 대한 모독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질식했지만, 지하철은 초 단위로 움직였다.

또 믿기 힘들지만 21세기에 곤장이라니?

미국의 낙서 청년이 싱가포르에서 엉덩이를 맞게 되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사정했지만 리콴유는 단호했다.

"법 앞에는 미국 대통령도 없다."


그는 반대자를 감옥에 보내 고문하는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 그들의 전 재산을 합법적으로 털어버렸다.

"나는 법을 어긴 게 아니라, 법을 잘 활용했을 뿐"이라는 그의 논리는 아주 세련된 독재의 정석이었다.


리콴유는 박수칠 때 떠나는 법이 없었다.

1990년 총리직을 내려놓고도 ‘선임 장관(Senior Minister)’, ‘멘토 장관(Minister Mentor)’이라는 기상천외한 의자를 만들어 국무회의 정중앙에 앉았다.

후임 총리들은 결재판을 들고 갈 때마다 뒤에서 들리는 리콴유의 "에헴" 소리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가 '수렴청정'을 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장남 리셴룽은 착실하게 가업을 이어받았다.

"이게 왕조 국가냐"는 비난에 그는 "내 아들이라 총리가 된 게 아니라, 총리가 될 인재가 하필 내 아들이었을 뿐"이라는 기막힌 해학을 선보였다.

아버지는 국가의 시스템 설계자였고, 아들은 그 시스템의 최적화된 운영자였으니, 이보다 완벽한 '패밀리 비즈니스'가 어디 있겠는가.


리콴유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자유로운 빈민가에서 살겠는가, 아니면 벌금 무서워 껌도 못 씹는 대궐집에서 살겠는가?" 그는 싱가포르를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부유하며, 가장 심심한 나라'로 만들었다.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 '반칙왕'이었지만, 국가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는 '게임의 신'이었다.

리콴유는 죽었지만, 그가 입력해 둔 '싱가포르.exe' 프로그램은 여전히 무한 루프를 돌며 작동 중이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은 왕이었고, 투표로 선출된 독재자였으며, 벌금으로 천국을 건설한 청소부였다.


리관유가 저세상에서 이 에세이를 본다면 아마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글 쓴 놈 잡아와서 태형 3대 때리고, 원고료에서 오타 벌금 500달러 공제해!
그리고 에어컨 좀 더 세게 틀어!"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