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유통기간 지나도 한참 지난 권력

무가베 (Robert Gabriel Mugabe)

by 한자루
출생 : 1924년 2월 21일 (로디지아 솔즈베리)
국적 : 짐바브웨
경력 : 2015.01.~2016.01. 아프리카연합 의장
1987.12.~2017.11. 제2대 짐바브웨 대통령
1980.04.~1987.12. 짐바브웨 총리
1975.03.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 대표정당,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배우자 : 그레이스 무가베
사망 : 2019년 9월 5일(95세) / 싱가포르 월드브리지 병원
종교 : 로마 가톨릭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왕관 하나쯤 품고 산다.

하지만 여기, 그 왕관을 머리에 아예 박아버린 사내가 있다.

짐바브웨의 '영원한 선생님'이자 '종신 엔진', 로버트 무가베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잘 짜인 셰익스피어의 비극 같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블랙코미디 같기도 하다.

그의 인생은 구조만 놓고 보면 교과서적인 비극이다.

다만 셰익스피어가 이걸 썼다면, 중간쯤에서 펜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미안한데, 이건 너무 판타지인걸. 관객이 안 믿겠다.”



무가베는 독재자의 클리셰를 정면으로 배신한 인물이었다.

총 대신 책을 들었고, 군화 대신 구두를 신었다.

가톨릭 학교에서 자란 그는 깔끔한 영어를 구사했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학위를 쌓아 올렸다.
무려 7개의 학위! 이쯤 되면 정치인이 아니라 “국가 공인 스터디 인플루언서”다.

백인 소수 정권에 맞서 싸우다 수감되었을 때, 세계는 그를 “아프리카의 간디”라 불렀다.

수염만 없었지, 서사는 완벽했다.

1980년, 독립의 종소리와 함께 무가베가 등장했을 때 그는 완벽한 해방의 아이돌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원한다"는 그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몰랐다.

그 '새로운 시작'이 37년 동안 리플레이 버튼만 눌러대는 무한 루프의 시작일 줄은.

어쨌든 초기에 그는 교육과 보건에 투자했고, 백인 농장주와 흑인 농민 사이의 유혈복수를 막아냈다.

그 시절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의 모범국가였다. 문제는 이 모범생이 좀처럼 졸업을 안 했다는 것이다.


권력은 무가베를 천천히 바꾸었다. 어쩌면 너무 천천히 바꿔서,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그는 경제학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토지를 몰수해 측근에게 나눠주고, 생산이 무너지자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

그때 무가베는 역사에 남을 해결책을 내놓는다.

“돈이 부족하다고? 그럼 더 찍어.”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다.
길거리 거지는 억만장자였고, 서류가방은 무거웠으며, 빵은 여전히 없었다.

세계 유일의 “부자처럼 가난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쯤 되면 무가베는 경제 대통령이 아니라 개념미술가다.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국민의 식탁 위에서 실험했으니 말이다.

결국 그는 자국 화폐를 포기하고 미국 달러와 남아공 랜드를 빌려 쓴다.
자기 나라 돈을 공식적으로 폐기한 대통령.
이 장면에서 셰익스피어는 확실히 웃었을 것이다.


무가베의 독재가 더 섬뜩했던 이유는 너무 점잖았기 때문이다.
칼같이 다린 수트, 옥스퍼드식 영어, 국제회의장에서의 당당한 연설.

그는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같은 날 밤, 반대파는 체포되었고 언론은 침묵했다.
선거는 늘 열렸고, 결과는 늘 기적이었다.
90%가 넘는 득표율이 반복될수록, 짐바브웨의 민주주의는 종교가 되었다. 믿지않으면 위험해 지는.


무가베를 이해하려면, 국내 정치보다 국제정치를 먼저 봐야 한다.
그는 냉전이 남긴 실험 결과였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했고,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실제로 북한 교관들이 훈련시킨 제5여단은 1980년대 초 마타벨렐란드 지역에서 최소 2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른바 구쿠라훈디다.

이건 말기 폭주가 아니다. 집권 초기부터 이미 작동하던 국가폭력이다.

그런데 세계는 침묵했다. 왜냐하면 그는 “해방 영웅”이었고, 냉전 시대엔 영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학살은 지역 문제였고, 명분은 국제회의장에서 세탁됐다.


1990년대까지 무가베는 서방에게 꽤 쓸 만한 지도자였다.

말 잘 듣고, 말도 잘하고, 정장도 잘 입었다.
IMF와 세계은행의 돈은 꼬박꼬박 들어왔고, 영국과 EU는 그를 두고 말했다.
“아프리카에도 이런 모범생이 있다.”

인권? 그건 좀 복잡한 문제였다. 민주주의?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했다.

요약하면 이랬다. “지금은 건드리지 말자. 일은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모든 게 괜찮았다. 정말로 모든 게 괜찮았다. 그가 백인 농장의 땅을 만지기 전까지는.

2000년대 초, 무가베는 갑자기 정의를 들고 나왔다.
“이 땅은 원래 우리 것이었다.”
탈식민의 언어는 매력적이었고, 대중은 환호했다.
하지만 막상 땅의 새 주인을 확인해 보니, 가난한 농민은 없고 정권 실세와 군부 간부만 있었다.

그 순간, 서방의 태도가 바뀌었다.
어제까지 “개혁적 지도자”였던 그는 오늘 아침 신문에서 “독재자”가 되었다.

독재가 새로 시작된 건 아니었다. 어제도 독재였고, 그제도 독재였다.
다만 어제까지는 괜찮은 독재였을 뿐이다.

서방에게 독재는 문제되지 않았다. 단 하나, 그 독재가 그들의 재산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서방의 다음 수순은 놀라울 만큼 빠르고, 또 놀라울 만큼 정석적이었다.
그들은 먼저 말이 바뀌었다.
어제까지 “개혁적 지도자”였던 무가베는 하룻밤 사이 “폭군”, “독재자”, “국제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사람은 그대로였지만, 형용사가 달라진 것이다.

말이 바뀌자 돈이 움직였다. 제재가 시작되었고, 정권 핵심 인사들의 해외 자산은 얼어붙었으며, 국제 금융기관의 문은 조용히 닫혔다.
IMF와 세계은행은 갑자기 바빠졌고, 짐바브웨는 “다음에 다시 보자”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한 나라는 국제 금융 질서의 대기실로 밀려났다. 의자는 없고, 번호표만 있는 대기실이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언제나 훌륭했다.
인권, 민주주의, 법치.
듣기만 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단순했다.
정권은 그대로였고, 통장은 비어갔으며, 빵 값은 국민이 감당했다.
독재자는 제재를 맞았지만, 배급표를 든 사람은 시민이었다.

서방은 무가베를 맹렬히 비판했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은 누가 하지?”
대체자는 없었고, 로드맵도 없었으며, 민주주의는 PDF 파일 속에서만 존재했다.

이 공백은 무가베에게 선물이었다. 그는 이제 모든 실패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가 망가지면 “서방의 제재 때문”이었고, 식량이 부족하면 “외부의 음모”였으며, 선거가 엉망이면 “제국주의의 간섭”이었다.

놀랍게도 이 설명은 꽤 잘 먹혔다. 적어도 적을 만드는 데에는.

그렇게 독재는 한 단계 진화했다.
국내 반대파와 싸우던 권력은 이제 국제사회를 상대로 싸우는 권력이 되었다.
외부의 적이 생기자, 내부의 균열은 오히려 봉합되었다.

그 순간, 독재는 더 단단해졌다. 총 때문이 아니라, 완벽한 핑계 덕분에.


그러나 2008년, 무가베는 마침내 선거에서 졌다. 이건 느낌상의 패배가 아니었다.
숫자로 확인된, 국제사회도 고개를 끄덕인 패배였다.
야당 MDC의 '모건 창기라이'가 1차 투표에서 앞섰다.

보통 이쯤 되면 정치인은 선택지를 고민한다.
은퇴 연설을 할 것인가, 회고록 제목을 뭘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골프를 배울 것인가.

무가베는 다른 계산을 했다.

권력을 넘기는 순간, 그는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조사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학살, 고문, 선거 조작, 토지 몰수. 그동안 덮어두었던 파일들이 하나둘 책상 위로 올라올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측근들까지 함께.

그래서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결선 투표를 하자.”

그리고 선거는 갑자기 투표함의 싸움에서 공포의 경쟁으로 바뀌었다.

군부와 정보기관이 움직였고, 마을마다 야당 지지자를 찾아내는 ‘정치 교육’이 시작됐다.
구타와 협박, 고문과 살해가 이어졌다. 선거 유세보다 구급차가 더 바빴다.

결국 창기라이는 말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결선을 포기하겠다.”

그렇게 무가베는 단독 후보로 승리했다.
졌지만 이겼고, 이겼지만 아무도 박수 치지 않는 선거였다.

이 사건은 분명히 보여줬다. 무가베에게 권력이란 명예도, 역사도 아니라 보험이었다.
만기 없는 생존 보험.


90세가 넘어도 무가베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2017년, 짐바브웨에는 극적이면서도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나중에 이것을 ‘쿠데타 같지 않은 쿠데타’라고 불렀다.

새벽녘, 수도 하라레에 탱크가 등장했다.
국영 방송은 군인들에게 점령되었고, 군부 수뇌부가 화면에 나와 말했다.

“이건 쿠데타가 아닙니다.”

탱크가 나왔고, 방송국을 장악했으며, 대통령의 측근들이 체포되고 있었지만 공식 입장은 끝까지 같았다. “쿠데타는 아닙니다.” 군부는 조심스러웠다.

무가베는 아직 살아 있었고, 그의 이름은 여전히 ‘해방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권을 전복하는 대신 정권을 치우는 방식을 택했다.

이 모든 일의 출발점은 무가베의 마지막 계산 착오였다.
그는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오랫동안 권력을 지탱해 온 군부와 당 엘리트들을 건너뛰고, 사모님 왕조를 준비한 것이다.

군부는 그제야 깨달았다.
무가베는 더 이상 자신들을 보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부터 질문은 바뀌었다.
“어떻게 무가베를 지킬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무가베 이후를 만들 것인가?”

무가베는 익숙한 방식으로 버텼다.
연설을 했고, 합법을 강조했고, 자신이 여전히 대통령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투표함도 소용없었고, 폭력도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엔 국민이 아니라 군부가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를 지켜주던 마지막 울타리가 무너진 순간, 37년간 버텨온 권력은 놀랍도록 조용히 끝났다.

무가베는 사임했고, 탱크는 물러났으며, 군부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보시다시피, 쿠데타는 아니었습니다.”

아마 역사책은 이렇게 정리할 것이다.
2017년 짐바브웨에서 벌어진 일은 권력을 무너뜨린 사건이 아니라, 더 이상 지켜주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고.

이것이 무려 37년짜리 무가베의 장기 집권 엔딩이었다.

무가베는 2019년, 싱가포르 병원에서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평생 비난하던 서구식 의료 시스템의 품 안에서였다.

오늘날 짐바브웨는 여전히 그 후유증 속에 있다. 경제는 회복 중이지만, 상처는 깊다.

그리고 100조 달러 지폐는 이제 독재와 실패한 권력의 엽서라는 기념품이 되었다.


로버트 무가베는 혼자 왕이 된 것이 아니다.
냉전이 그를 키웠고, 서방이 묵인했고, 군부가 버팀목이되었으며, 국제사회가 피곤해질 때까지 방치한 왕이었다.

그의 인생이 남긴 질문은 이것이다.

'영웅은 언제 내려와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아직 박수를 받을 때.'

영웅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적이 아니라, 끝내지 않는 권력이다.

그는 진심으로 나라를 사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권력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사랑은 관리가 되고, 관리는 통제가 되며, 통제는 폭력이 된다.

무가베는 대통령이었고, 왕이었으며, 동시에 ‘왜 권력은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가’를 증명한 사례였다.


그가 죽어서도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짐바브웨야. 나 없이도 괜찮으냐?”
짐바브웨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당신이 준 100조 달러 지폐는 아직 기념품으로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는 지금,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지폐에 숫자를 세느라 빵을 못 사는 일은 없습니다.”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