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택 앞에 우리가 던지는 질문, '하나님은 누구신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12장 15절, 개역개정)
우리가 믿음을 가장 깊이 시험당하는 순간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스스로 생을 끊었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그 죽음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 신앙의 뿌리를 뒤흔듭니다.
특히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충격은 더 깊어집니다.
믿음 안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던 사람이 왜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가 하는 질문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장례식장의 침묵 속에서, 혹은 남겨진 자리의 공허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쉽사리 대답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리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지막 고통과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마주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살하면 지옥에 가나요?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이 질문은 때로 신앙을 너무 좁은 틀에 가두고 맙니다.
마치 믿음이란 규칙을 잘 지켜 벌을 피하게하는 수단이고, 복음을 일종의 보험처럼 전락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단지 천국 입장을 목표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생명을 통해, 이 땅에서 사랑과 기쁨과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신앙은 그 ‘살아 있음의 의미’를 되찾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살을 말할 때마다 “지옥이냐, 천국이냐”만 따진다면, 결국 복음은 공포와 규칙의 언어로 축소됩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셨고, 그것을 돌보고 살리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생명을 긍정하고, 생명을 끝까지 붙잡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이 있다고 해서,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너무 깊은 어둠 속에서 끝내 손을 놓아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있었다면 왜 자살했을까?”
이 물음은 때로 너무 차갑고, 너무 쉽게 던져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겐, 말도 기도도 닿지 않는, 누구도 손잡아 주지 못하는 외로움의 순간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 들면, 그건 그 사람의 삶과 죽음을 도구처럼 쓰는 일이 됩니다.
“믿음이 약했네.” “끝까지 붙잡지 못했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고통은 보지 않은 채, 신앙의 성공 여부만 따지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이 충만했다면 자살하지 않았을것이다.”는 주장을 듣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한 삶은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집착한다면 신앙을 영적 성과주의로 축소할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성령 충만한 상태로만 사는 존재는 아닙니다.
여전히 육체적, 정신적 연약함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도 감정적으로 무너질 수 있으며, 병들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라고 했지만, 그 자체가 답답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는 초월 상태가 아니라, 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려는 삶의 태도를 포함합니다.
우리가 자살이라고 부르는 많은 죽음은, 단순히 한 사람의 자발적인 선택만으로 설명될 수 없수 없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을 분석하면서 이것이 단지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 구조가 빚어낸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자살은 치밀하게 계획된 탈출이지만, 어떤 자살은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폭발입니다.
또 어떤 경우는 분노와 호소의 메시지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신앙의 열망이 잘못된 방식으로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자살은 하나님의 생명 주권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죄를 다룰 때는 단지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 그 죄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복합적인 배경과 인간의 깊은 고통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자살을 같은 범주 안에 넣고 “이것은 죄다.”, “이것은 구원의 상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한 일반화는 신학의 이름을 빌린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울증, 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 의해 자기 통제 능력을 잃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 목사님 중에는 우울증을 '세상을 우상으로 섬긴 죄'의 결과로 해석합니다.
이 관점은 죄에 대한 너무 단선적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우울증은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단지 ‘생각의 습관’이 아니라, 뇌의 화학적 불균형과 신경학적 증상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탐욕, 불안, 실패한 욕망처럼 세속적 가치에 대한 집착이 우울의 뿌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우울증을 ‘세상을 우상화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환자에게 2차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세상을 죄로만 보지 않습니다.
창조의 질서, 타락의 현실, 구속의 은혜라는 세 가지 시선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울증은 타락 이후 깨어진 인간의 한 양태이자, 회복과 치유의 대상입니다.
자살을 모두 구조와 사회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살을 한 개인의 연약함과 신앙의 부재로만 돌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죽음을 단지 “믿음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외면한 채, 고통받은 사람만을 탓하는 셈입니다.
또한 어떤 자살은 과도한 채무, 실직, 질병, 가난, 고립 등 사회구조가 만든 압박의 결과일 때도 있습니다.
그 죽음은 분명 개인적인 선택은 있었지만, 그 선택을 밀어붙인 건 사회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자살의 개념은 때로 더 복잡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당시 군복무 중이던 한 병사가 적의 수류탄이 부대 안으로 날아들었을 때, 주저 없이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덮고 동료들을 지켜냅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던졌습니다.
이런 죽음을 우리는 “자살”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희생, 용기, 책임감의 극치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살이라고 부르는 다른 죽음들에도 복잡한 내면과 절절한 사연,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과 압박이 있진 않았을까요?
그 선택 앞에 긴 시간의 눈물과 침묵, 그리고 고통이 있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결코 자살을 정당화하거나 용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살을 막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하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지고 넘어진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회복의 가능성 역시 여전히 열려 있음도 믿습니다.
하나님은 “죽지 말라.”고만 하신 분이 아니라, “살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먼저 정답을 말하기보다,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걸어주고, 함께 울어주고, 삶이 무너지는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주는 사람.
그리스도인의 자살을 바라보는 관점은 지옥과 천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삶의 목적을 알려주는 자리에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은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신앙은 판단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 앞에 멈춰 서는 용기입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나눌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너지는 그 자리에 함께 서서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
그 말 한마디로 삶을 이어가는 누군가를 위해 등불처럼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살이라는 무거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누구를 평가하기 위한 잣대가 아니라, 무너져가는 생명을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의 공포로 사람을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공포로 몰아넣는 협박의 말 대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무너진 이들에게도,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은혜와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고통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삶은 끝나지 않았다고, 끝까지 살아보자고 말해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곁에 있어줄 사람, 손을 붙잡아줄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을 지지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과 좌절에 갇힌 이들에게, 하나님의 손내미심을 바라보게 하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도록 돕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살아봅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단정짓기 위한 판단이 아니라, 무너진 생명도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증언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끝까지 서로를 붙드는 삶 속에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