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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이혼해도 될까요?

이혼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

by 한자루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마가복음 2:27




“하나님, 이 결혼... 정말 계속해야 하나요?”

신앙 안에서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끝자락에서, 눈물 속에서, 어떤 이들은 이 질문을 오래 붙들고 씨름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쉽게 이혼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태복음 19장 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혼을 신성한 서약으로 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경고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폭력 앞에서도 참고,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도 침묵하며, “이혼은 죄니까”라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혼은 무조건 죄일까요?

우리의 삶은 사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대해서 "이건 무조건 죄야", "이건 절대 하면 안 돼."라고 쉽게 말하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쪽으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계약'(contract)이 아니라 '서약'(covenant)입니다.

계약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파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약은 존재를 건 약속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드러내는 정체성의 선언이자 사랑을 시간 속에 묶어내는 결단입니다.

서약은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고백입니다.

그건 단지 감정에 근거한 선택이 아니라, 변덕을 이기고, 상황을 견디며, 타인의 생을 끝까지 받아들이겠다는 성숙한 사랑의 형식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바로 그 언약처럼, 깊고 무거운 책임의 끈을 뜻합니다.

그 끈은 때론 무겁고, 때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끈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걸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약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짊어지는 짐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세워가야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 혼자 버티고, 혼자 용서하고, 혼자 상처 입고 있다면 그 서약은 이미 균형을 잃은 언약입니다.

신앙이 결혼을 신성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 안에 사랑과 책임, 인격적 존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정서적으로 끊임없이 학대를 가하거나,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울 수 없는 환경이라면 어떨까요?

그리고 어떤 노력과 대화로도 더 나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 관계를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예수님은 죄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가지셨지만,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먼저 다가가시는 분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떠올려 보세요.
그녀는 다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모두 깨졌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회라면 비난과 외면이 당연한 처지였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말없이 다가가, 그녀의 갈증 난 영혼에 먼저 ‘생명의 물’을 건네셨습니다.

그녀의 과거보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목마른 존재인지를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우상처럼 여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관계보다 사람을, 형식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단지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지금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혼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서약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일 뿐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죄입니다.

결혼은 “내가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함께 세워가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단순한 자기 욕구와 욕망으로 선택되어져서는 안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혼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남성에게만 있었고, 여성은 언제든지 남성의 변덕이나 욕심에 따라 버려질 수 있었습니다.

서양뿐 아니라 유교 문화권, 특히 중국과 조선시대의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이혼과 관련된 제도는 남성중심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정당화하는 칠거지악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 일곱 가지가 있었는데 시부모님께 불순종한다든지, 아들을 낳지 못했다든지, 질투를 한다든지, 심지어 병이 들었을 때조차 쫓아내도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유 하나 하나가 가장 연약하고 돌봄이 필요한 순간에 쫓겨날 수 있었다는 것, 그게 당시 여성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가부장적 세계 속에서 여성은 언제라도 재화처럼 사용되다가 폐기될 수 있는 상품 취급을 받기 일쑤였단 말이입니다.

성경이 이혼을 금지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물로 맺어진 관계를 인간의 욕망과 변덕에 따라서 함부로 해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혼을 엄격히 제한한 이유는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파괴를 막기 위한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의 본뜻은 “절대 이혼하지 마라.”가 아니라 “관계를 함부로 끊지 마라, 연약한 이를 버리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압이 아니라 배려와 보호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는 이 구절은 이혼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데 쓰일 것이 아니라, 결혼을 시작하고, 유지하고, 때로는 끝맺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신앙적 안내문으로 읽혀야 합니다.


누군가가 결혼 안에서 깊이 상처받고 있다면, 결혼의 서약이 우리를 짓누르고,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마저 끊어놓고 있다면, 그때는 다시 기도해도 됩니다. 다시 질문해도 됩니다.

결혼은 소중한 약속이지만, 그 약속이 우리를 파괴하도록 방치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지만, 그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삶, 우리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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