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없는 조건 앞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살다 보면 자기 인생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왜 이렇게 안 풀리는지 답답해질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왜 이렇게 항상 제자리걸음일까.
애써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슬며시 무력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내 인생엔 왜 이렇게 추억할 만한 게 없을까? 왜 이렇게 앞으로 기대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럴 때, 삶은 무겁고 내일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비교가 마음의 중심에 자리를 잡습니다.
“저 사람은 웃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지?”
“저 사람은 건강한 것 같은데, 나는 왜 맨날 아프지?”
“다른 집 부모님은 뭔가 든든해 보이는데, 우리 집은 왜 늘 아슬아슬하지?”
그러다 보면 원망이 고개를 들고, 불평이 입에 맴돌게 됩니다.
불평할수록 우리는 더 허무해집니다. 불평한다고 현실이 변하지 않으니 마음만 더 상하게 되는 거죠.
인간에게는 숙명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것
이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 즉 바꿀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 조건들이 우리 삶을 자꾸 설명하려 든다는 겁니다.
우리도 모르게, “나는 원래 안 되는 사람”이라며 자기 삶을 규정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뀔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원망해도, 불평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의 조건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꿀 수 없다면 수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내가 건강하게 태어났더라면...” “우리 부모님이 부자였더라면...” “내 외모가 조금 더 예뻤더라면...”
"내가 머리가 조금 더 좋았더라면...”
이런 바꿀 수 없는 조건들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운명과 좌절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은 점점 무겁고 답답한 굴레가 되죠.
그럴 땐 결국 ‘이 조건 속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묻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문득, 오래전에 본 다큐멘터리가 떠오릅니다. 폐광촌에서 태어나 자란 한 청년이 나왔습니다.
그 마을엔 일자리도, 학교도, 미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도시로 떠나는 대신, 마을에 남아 자신만의 가게를 차렸습니다.
누군가 보기엔 어리석은 선택이었지만, 그는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여길 떠나야 했고, 누군가는 여기에 남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있는 곳에서 제 삶의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듣는데, 마치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작은 고백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정해놓은 루트, “이렇게 살아야 성공한다”는 공식을 따라가려 애씁니다.
어떤 대학, 어떤 직장, 어떤 집, 어떤 모양의 행복.
그 공식에 맞지 않으면 자꾸 뒤처지는 기분이 들고, 삶이 버겁게 느껴지죠.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공식에 맞추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만의 문장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삶의 문법을 만드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부르심에 따라 '기준을 새롭게 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고유한 자리, 고유한 삶, 고유한 언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세상이 써놓은 문법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문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주변의 기준에 기대지 않고,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당당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질문하는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조건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게 주어진 이 삶에서, 내가 만들어나갈 수 있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품고,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운명이 우리를 붙잡는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자유와 희망의 지평이 조금씩 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데에는 분명한 계획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 대신 해석을 선택하는 삶! 그게 바로 기독교인이 세상 속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때론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물론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을겁니다. 우리는 그분의 계획과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계획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삶을 통해 찾아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하고 걱정될 때, 그럴 때는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요?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어쩌면 우리에겐 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 안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당신을 일으키려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아닙니다
내 삶의 조건이 내 인생의 정체성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우리는 운명의 피해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능동적인 존재입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못한 조건 때문에 주저앉지 않겠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삶을,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겠다."
이 고백이 세상 속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