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새해에 내려놓은 건강 강박증

반복되는 새해 결심 앞에서

by 한자루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경건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뿐 아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생명도 약속해 줍니다.
- 디모데전서 4장8절




새해가 밝았습니다.


해가 바뀐다는 말 앞에서는 늘 몇 가지 마음이 먼저 떠오릅니다.
살을 좀 빼야겠다는 생각, 운동을 시작해 보겠다는 다짐, 이번만큼은 건강을 조금 더 챙겨 보겠다는 마음 같은 것들입니다.

이 결심들이 해마다 반복되는 이유는 아마도 아직 우리 삶에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이런 다짐들을 다시 꺼내 들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새해를 앞두고는 기대와 함께 작지 않은 부담도 찾아옵니다.
이번에는 잘 해내야 할 것 같고, 이번에는 달라져야 할 것 같아서 시작도 하기 전에 숨을 한 번 더 고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이 결심들이 늘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결심을 세우는 순간부터 조금은 머쓱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표가 분명해지는 순간, 사람은 달라집니다.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수십 년간 끊지 못했던 담배와 술을 단번에 내려놓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의지가 갑자기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이유가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의 다이어트도 그렇습니다.
늘 “다음 주부터”였던 다짐이 결혼 날짜가 정해지는 순간 놀라울 만큼 성실해집니다.
몇 달 사이 체중이 줄고, 그 모습은 아름다운 결혼사진으로 남습니다.

물론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다시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몇 달을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절실해지면 사람은 몸을 움직입니다.
몸이 힘들어도 시간을 만들고, 환경이 여의치 않아도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은 의지의 실패라기보다 그 결심이 아직 삶과 충분히 이어지지 않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왜 해야 하는지가 아직 몸까지 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새해마다 반복되는 건강에 대한 결심도 조금 다른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왜 건강해지려는 것일까요? 그 몸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건강해져야 한다”는 말은 분명 옳습니다. 누가 들어도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그리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건강해져서 무엇을 하겠다는 이야기보다는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만 남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할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질 것 같고,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하지만 삶에서 실제로 쓰이지 않는 준비를 몸은 끝까지 따라주지 않습니다.
몸은 생각보다 정직해서 필요 없는 긴장 앞에서는 어느 선에서 멈춰 버립니다.

어쩌면 몸은 “이건 아직 아닌 것 같다.”라고 조용히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건강’이라는 말을 조금 다른 귀로 듣게 됩니다.

건강해지라는 말이 더 오래 준비하라는 말처럼 들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아니라고, 조금만 더 관리하고, 조금만 더 대비하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살아도 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늘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먼저 살아 보라고, 먼저 걸어 보라고, 염려를 다 정리한 뒤가 아니라 염려를 안고서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오라고 부르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몸을 돌보는 일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몸을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에야 삶을 시작하겠다는 마음은 어느 순간 믿음이 아니라 통제가 되어 버립니다.

기도보다 계획이 앞서고, 맡김보다 계산이 많아질 때 몸은 더 이상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불안을 붙잡아 두는 마지막 근거가 됩니다.

어쩌면 몸이 지치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아파서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오늘의 몸에게 대신 살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 쪽으로 옮겨 보라는 초대처럼 들립니다.

몸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니라, 몸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한 걸음 걸어 보라는 초대 말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은 분명한 순서를 보여 줍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성경은 언제나 영혼을 먼저 둡니다. 그다음이 삶이고, 그다음이 몸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몸은 점점 부담이 됩니다.
아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유지해야 할 프로젝트가 되고,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몸은 쉬어도 쉬지 못하고, 잘해도 늘 부족한 상태로 남습니다.

반대로 영혼이 조금 정리되기 시작하면 삶은 지나침에서 내려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덜 하게 되고, 꼭 붙잡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건강은 아마 이런 모습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더 강해지는 상태가 아니라, 삶이 과해 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상태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끝에 놓인 ‘절제’라는 말도 이를 악물고 참아내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여기까지면 충분하다는 조용한 허락처럼 들립니다.

균형이란 더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용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새해를 앞둔 지금, 건강에 대한 결심 앞에서도 조금은 속도를 늦추고 싶어 집니다.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를 묻기보다 왜 이걸 하려는지를 먼저 묻고 싶어 집니다.
몸을 더 몰아붙이기보다 이 몸으로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지를 조용히 떠올려 보고 싶어 집니다.


사실 우리의 대부분은 극한의 체력을 요구받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히말라야를 오를 일도 없고, 철인 삼종 경기에 나설 이유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하루는 출근하고, 이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는 일로 채워집니다.

몸을 쓰긴 하지만 혹사해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문제는 체력이 모자라 서라기보다 하루가 생각보다 길고 마음이 지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이 차서가 아니라 마음이 복잡해서 힘들고, 근육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여유가 부족해서 피곤한 날들을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삶에 필요 이상의 건강을 스스로에게 요구합니다.
마치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한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하루를 살아내고, 사람을 만나고, 말을 건네고, 기도로 하루를 정리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건강이란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저녁에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 한마디를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습니다.

어쩌면 건강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자족의 문제일지 모릅니다.

새해의 결심이 또 하나의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해내야 할 목록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 걷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이 되면 좋겠습니다.

몸을 돌보되 집착하지 않고, 준비하되 두려움에 끌려가지 않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그 균형 속에서 몸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아도, 과하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필요한 만큼 조용히 따라옵니다.

세상 속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항상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괜찮지만, 지금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는 잊지 않으려는 사람 말입니다.


그 방향이 분명하다면 몸은 필요한 만큼 조용히 동행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는 더 관리하고 더 단단해지기보다 균형과 자족을 선택하며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으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