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1월의 허리가 꺾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작심삼일을 자책하며 다시 스케줄러를 고쳐 쓰겠지만, 제가 보기에 정작 위태로운 이들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시간 관리에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더 효율적으로 살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얇아집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 정복했다고 믿는 순간, 우리 영혼은 그 촘촘한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질식하기 시작합니다.
1초의 낭비도 허용하지 않는 ‘성실’이라는 채찍 아래서 우리는 선물로 받은 하루를 ‘치워야 할 숙제’처럼 해치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분주한 새해를 향해 무례하고도 발칙한 선언을 하나 던지려 합니다.
“올해는 시간을 더 잘 쓰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어쩌면 새해 다짐으로는 꽤 불성실한 말 같습니다.
서점에는 이미 시간을 5분 단위로 쪼개 쓰라는 책들이 진열되어 있고, 우리는 서로에게 더 바빠질 것을 덕담처럼 건네는 계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문장을 새해의 문 앞에 걸어두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오래, ‘시간을 잘 쓰는 법’에 대해 너무 많이 속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관리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인간이 시간을 관리한 적이 과연 있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초침의 속도에 심장 박동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시계가 허락한 속도 안에서만 안심하고, 조금만 뒤처져도 존재 자체가 낙오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크로노스(Chronos)는 단순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가장 냉혹한 통치자입니다.
모든 것을 낡게 만들고, 마침내는 죽음이라는 막다른 길로 밀어 넣는 직선의 폭군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크로노스는 잔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성과와 효율이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세상에서 시간은 곧 돈이고, 뒤처진다는 것은 곧 존재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가 되면 이렇게 다짐합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바쁘게, 더 알차게 살아야지.”
하지만 어쩌면 그 다짐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겠다는 고백이 아니라, 크로노스라는 우상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선언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그런데 이 구절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계발서의 문장으로 번역해 버렸습니다.
시간을 절약하라, 허투루 쓰지 말라, 더 생산적으로 살아라.
그러나 원문에 사용된 단어는 ‘절약(save)’이 아니라 ‘구속, 구원, 되찾다. (redeem)’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생명을 대가로 치르고 우리의 생명을 다시 사 오신 그 장면에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시간을 아껴 써라.”가 아니라 “대가를 치르고 시간을 건져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효율이 아니라 태도이고, 관리 기술이 아니라 존재 방식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시간, 카이로스(Kairos)는 시계가 가리키는 ‘때’가 아니라 의미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카이로스는 흐르는 강물을 멈춰 세우는 영원의 침입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잘 사용하는 능력’이 아니라,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용기’에서 탄생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이라는 긴박한 과업을 앞두고도 한 번도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길가에 핀 꽃을 보셨고, 어린아이들의 조잘거림에 발을 멈추셨습니다.
길가의 소경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추셨고, 바쁜 사역 한가운데서 산으로 들어가 홀로 시간을 ‘버리셨습니다’.
효율의 관점으로 보면 명백한 ‘시간 낭비’였지만, 그 낭비의 틈새로 천국이 임했습니다.
삶이 얇아지는 이유는 우리가 시간을 못 써서가 아니라, 영원이 뚫고 들어올 ‘빈틈’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우리 삶이 너무 꽉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비용과 시간을 계산하며 그것을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그 ‘비효율’을 영원히 기억될 순간으로 바꾸셨습니다.
카이로스는 내가 시간을 지배할 때 오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잠시 멈추고, 영원이 내 삶에 말을 걸도록 허용할 때 찾아옵니다.
사랑을 선택하느라 계획을 포기했을 때, 목적지 없는 산책에서 이유 없는 평안을 만났을 때, 고통받는 사람 곁에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을 함께 보냈을 때, 그때 우리는 크로노스의 영토를 벗어나 카이로스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시간을 ‘알차게’ 쓰는 모습을 기뻐하실 거라고.
그래서 성경 읽은 분량, 기도한 시간, 예배의 횟수를 숫자로 세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인격이 아니라 우리가 해치워야 할 일정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당신의 성취가 아니라 당신의 현존(Presence)입니다.
‘Do’가 아니라 ‘Be’.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시간을 쥐어짜는 삶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기 위해 시간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삶.
카이로스는 우리가 시간을 움켜쥘 때가 아니라, 꽉 쥔 손을 펴고 시간을 내려놓을 때 찾아옵니다.
누군가에게 시간의 흐름은 소멸이지만, 카이로스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의 흐름은 완성입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바울의 고백은, 크로노스의 지배를 거부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이렇게 다짐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시간을 더 잘 쓰지 않겠습니다. 대신 시간을 멈추고, 영원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성실하게 살되 시계의 노예가 되지는 마십시오.
계획을 세우되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개입을 위한 빈자리를 남겨두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365일이라는 캔버스 위에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수놓는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더 잘 쓰지 않겠다."는 선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옥죄는 시간의 독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가장 능동적인 싸움입니다.
이 막연한 싸움을 시작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할 지도 모릅니다.
이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세상의 속도에 접속하는 대신, 단 10분만이라도 아무 계획 없이 하나님 앞에 멍하니 머물러 보십시오.
이 10분은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오늘 하루라는 '크로노스'를 하나님의 '카이로스'로 바꾸는 가장 거룩한 낭비가 될 것입니다.
또 스케줄러의 다음 일정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당신의 시간을 필요로 할 때,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기쁘게 수용해 보는 건 어떨까요? 스케줄러의 다음 일정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의 눈동자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 비효율적인 친절이야말로 시간이 '자원'에서 '은혜'로 변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사건은 언제나 우리의 계획이 빗나간 지점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리고 하루의 끝에선 '감사의 마침표'를 찍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 묻지 말고, 오늘 내 삶에 간섭한 하나님의 순간이 언제였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설령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하루였을지라도, 우리가 숨 쉬고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합니다.
성과를 보고하는 일기가 아니라, 동행을 고백하는 기도로 하루를 닫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간 것입니다.
세상 속을 걷는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이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소멸의 과정이 아니라, 생명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발견의 여정일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내 힘으로 시간을 정복하려는 기술자가 되기보다, 매 순간 주어지는 시간을 경탄하며 받아들이는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증명해 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나를 살게 하시는 이의 숨결에 나의 초침을 가만히 맡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이야말로 새해라는 선물의 포장지를 구기지 않은 채, 그 안에 담긴 설렘을 오롯이 마주하는 가장 다정한 방법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