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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cide Mio Sep 28. 2024

에어팟을 잃어버리고 깨달은 것

늘 사용하던 에어팟을 잃어버렸었습니다. 직장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오후 몇 시간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서 잠시 음악을 들으려 에어팟을 찾았는데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더 저를 황당하게 만든 것은 충전을 위한 케이스는 늘 있던 자리에 있는데 두 개의 에어팟만 그 안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마 어디에선가 사용하던 중에 그것을 빼놓았던 것 같은데 어디에 빼놓았는지 기억이 안나더군요. 


나이가 점점 들면서 종종 늘 알고 있던 단어나 사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단어를 지난주에도 사용했고 누구와 만난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그 단어를 왜 썼는지 까지도 기억이 나는데 그 단어만 생각이 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짜던 경험이 종종 있습니다. 쥐어짜서 기억을 되살려 내기도 했지만 포기하고 있다 보면 며칠 후 혹은 몇 분 후에 자연스럽게 기억이 나는 경우도 있더군요. 


그런데 에어팟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고 그래서 당장 사용하고 싶은 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니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과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기더군요. 더구나 제가 가지고 있는 아이폰은 스테레오 오디오 출력 단자 대신 블루투스나 썬더볼트로만 연결이 되니 서랍에 넣어 두었던 구형 유선 이어폰은 쓸모가 없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이폰의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보면 그저 아이팟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음악을 참 좋아합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선물로 받고 그 안에서 나오는 음악에 반해 라디오를 끼고 살았었습니다. 야단치시는 부모님 몰래 그 라디오를 들고 이불속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근에 나오는 스테레오 4D 공간 음향 사운드와는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흰색 이어폰을 한쪽 귀에만 꽂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심취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소니에서 워크맨을 출시했고 아버지께서 그것을 구입하셨지요. 요즘의 기기에 비하면 엄청난 크기와 무게를 자랑하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아주 작은 회색의 장치에 카세트를 끼우고 작동법을 설명해 주시던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큰 실수였지요. 저는 워크맨의 주황색 작은 헤드폰에서 나오는 소리에 반해서 하루 종일 그것을 끼고 살았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께서 쓰시려고 산 물건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제가 사용하는 시간이 더 많아져버렸습니다. 결국 몇 달 후 아버지께서는 워크맨을 포기하시고 저에게 그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학생 때부터 가지게 된 이 워크맨을 10년 이상 들고 다니며 들었습니다.  

그렇게 접한 음악은 그 이 후로도 계속 제 주위에 있었고 50대 중반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예전의 음악을 듣고 또 새로 나오는 음악과 소리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음악뿐만 아니라 오디오 북과 팟캐스트도 제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친구들입니다. 기술은 흰색 모노 이어폰에서 유선 헤드폰을 거쳐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바뀌었지만 그렇게 몇 십 년간 하루에도 몇 시간씩 귀에 꽂고 소리를 듣던 친구가 사라졌으니 참 답답하더군요. 


일과를 마치고 인근의 공원에서 조깅을 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볍게 달리며 늘 귀에 꽂고 음악이나 책을 듣곤 했었는데 그게 없으니 뭔가 많이 어색했습니다. 귀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늘 달리던 공원 길이 너무 조용했고 전혀 와보지 않은 새로운 곳에 온 느낌이 들더군요. 그런데 그동안 에어팟 때문에 듣지 못했던 단조로운 저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공원을 달리면서 어느 사이에 처음 느꼈던 공원의 고요함은 더 이상 고요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제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 닿는 작은 돌멩이와 모래와 잔디, 그리고 흙과 시멘트가 전부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달리면서 내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놀라서 피하는 작은 동물들이 길가 덤불 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나무 가지에 앉아 다양하게 울어대는 여러 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갔을 때 그 새들의 울음이 한꺼번에 멈추는 침묵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의 소리와 그 바람 때문에 서로 부딪치며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과 나뭇잎의 소리가 있었고 뒤에서 달려오는 자전거의 페달 소리와 “왼쪽에서 가고 있어요!(On your left!)”라고 소리치는 자전거 탄 사람의 외침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경쟁심이 줄어들었을 만도 한데도 뒤에서 달려오는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들을 때면 저도 모르게 달리는 속도가 높아지더군요.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추월당했지만 말입니다. 


심심하고 단조로운 달리기라는 생각에, 그리고 늘 음악을 끼고 살았던 저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동안 에어팟을 끼고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지고 나니 세상은 그동안 듣지 못하던 다른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듣던 음악과는 다른 소리지만 그 소리들도 아름답고 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느 사이엔가 여러 가지 생각들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생각들은 음악을 듣거나 오디오 북을 들으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생각들이었습니다. 음악이나 오디오북처럼 제가 의도적으로 관심을 한쪽으로 유도할 때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그런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제 주위에서 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소리들 속에서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생각들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에어팟으로 즐겨 듣던 그 소리들 역시 제 주의력을 방해하고 도파민의 분출을 이끌어내는 또 다른 종류의 “자극" 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특히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온라인 세상에는 우리의 관심과 주의력을 끌려는 무수한 종류의 ‘자극’적인 미디어가 가득합니다. 이제는 웬만큼 자극적이어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미디어만 살아남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매일 접하는 자극적인 정보의 양도 엄청나다 보니 내가 접하는 정보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따져 볼 생각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정보인지 확인할 겨를이 없이 우리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자극적인 정보를 접하고 나면 우리는 그 내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져 보기 전에 먼저 판단을 내리고 그 정보가 주는 자극에 따라 기뻐하기도 하고 또 분노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정보가 실제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이 드러날 즈음에는 “뭐,  그랬나?” 하는 정도로 반응하고  금세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기뻐하고 화내야 할 또 다른 ‘자극’이 이미 등장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고 다음 ‘자극'으로 넘어가는 동안 그 이전의 ‘자극’ 때문에 피해를 받고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그들에게 이 ‘자극적'인 정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가 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결국 우리가 아무런 종류의 자극에도 충격을 받지 않는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어떨지는 상상하기조차 싫습니다.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을 막는 방법은 우리 주위의 자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인데 저는 에어팟을 귀에서 빼고 있는 시간을 늘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주위에서 내게 주는 자극 없이 내 머리로 생각하고 그 속에서 기쁨과 행복, 슬픔과 분노를 찾으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속에 혼자 사는 은둔자가 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되 주위의 자극에 영향을 받기 쉬운 내 마음 상태를 늘 명심하고 잠시라도 그런 자극이 없는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점점 그런 시간을 늘리다 보면 자극에 쉽게 영향받고 있는 나 자신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주 단순한 일에도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고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책상 위에 쌓인 서류 폴더 속에서 에어팟을 찾았습니다. 아마 잠시 귀에서 빼서 서류 위에 두었다가 그대로 폴더를 덮으면서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찾아서 이제 다시 음악과 오디오북과 팟 캐스트를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하루 종일 에어팟을 끼고 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에어팟 밖의 세상에도 소리가 있고 또 그 소리들은 그동안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주고 호기심을 자극하니 말입니다. … 이런 또,  “자극"을 받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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