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말할 의무
과연 이걸 주제로 '말말말'을 정리해도 좋을지 참으로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욕설 막말'이니 '자격미달'이니 하며 열을 올리고 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왜곡'이다 '악의적'이다 하며 '유사언론탄압'을 자행하고 있으니 어느 쪽의 편을 들더라도 나에게는 손이었다. 그럼에도 9월 한 달간 미디어를 장식한 그 어떤 '말말말'보다 3초짜리 한 마디가 훨씬 강력했으니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 날아간 것은 바이든도 국회도 아니었다... 바람 타고 떠나간 진실된 국격
22일 오전 9시 30분경 카카오톡으로 동영상을 하나 전달받았다. 영상의 내용은 이러했다. 미국을 순방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역점사업 중 하나인 '글로벌 펀드 재정회의' 관련 행사를 참석한 뒤 행사장을 빠져나가던 중 박진 외교부 장관과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등 참모를 향해 모종의 '한 말씀'을 하는 장면이었다.
◎9월 22일
윤석열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쪽팔려서 어떡하나?"
시끌시끌 잡음이 많은 터라 듣기에 불편함은 있었지만 발언의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윤 대통령은 글로벌 펀드 재정회의에 대한 공여금 기부액을 증액하겠다 발표한 뒤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각국 지도자 및 참모진 등 수많은 참석자가 이리저리 섞이며 자리를 이동하는 와중에 취재기자들까지 한 데 뒤섞여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윤 대통령의 순방을 취재하고자 현지에 동행한 대통령실 출입 영상기자의 카메라에 해당 발언이 포착된 것이다.
◎9월 22일
대통령실 "공식석상이 아니었고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외교적으로도 부담"
해당 영상을 포착한 풀 취재(Pool; 공동취재·대표취재) 기자는 대통령의 일정을 좇느라 여력이 없어 영상의 내용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영상기자단과 대통령실에 전달했다고 한다. 모르고 지나쳤을 수 있는 영상을 다시 끌어올린 것은 대통령실이었다.
당장 며칠 뒤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전문가가 와도 모른다'라며 뻔한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을 마당에 오히려 대통령실 직원들이 나서서 기자들도 모르던 대통령의 아찔한 발언을 대신 발굴해준 꼴이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대통령실 대외협력단은 영상에 대통령의 부적절한 언사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한 뒤 영상기자단에 보도되지 않게끔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상기자단은 이를 거절하였고 영상은 이른바 '받'의 형태로 국내 기자들에게 전파됐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대통령실은 대통령의 발언이 공식석상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며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고 외교적 부담 또한 있다며 재차 비보도를 요청했으나 대통령실 출입 기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9월 22일
박홍근 "빈손·비굴 외교에 이어 막말 외교로 국격이 크게 실추됐다"
박홍근 "미 의회 폄훼하는 발언 영상에 담겨... 대형 외교 사고로 물의"
야당은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원내대표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회장을 빠져나오며 미국 의회를 폄훼하는 발언을 했으며 이를 대형 외교 사고로 규정했다. 가뜩이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 조문이 무산됐다는 등 윤 대통령의 순방을 '빈손 외교'라며 공세를 올리던 야당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격 재료가 생긴 것이다.
◎9월 22일
MBC "尹,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최초 보도는 이날 오전 10시경 MBC에서 나왔다. 향후 쟁점이 될 "바이든"을 명시한 보도였다. 사태는 일파만파로 퍼졌다. MBC의 보도가 있자 KBS, SBS, YTN 등 각 방송사는 물론이고 순방에 동행한 통신사 및 신문사에서도 온라인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9월 22일
김의겸 "대통령의 말씀, 국민들은 부끄러워서 어떻게 하나"
김의겸 "대통령이 저잣거리 용어 사용... 공식 사과하고 김성한 김태효 박진 경질·교체해야"
박정하 "민주당, 본질과 관계없는 사항으로 외교적 성과를 호도하고 있어"
박정하 "민주당의 국익 훼손 시도... 자해 행위 중단해야"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쪽팔린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에 빗대 국민들은 부끄러워서 어떡하느냐며 논평을 발표했다. 김 대변인은 논평에서 한미 통화스와프 불발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조문 결례, 굴종적인 한일정상회담 등을 언급하며 "빈손 외교에 외교 욕설까지 겹쳤다"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과 김태효 1차장, 박진 외교부 장관을 경질하고 교체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박정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의 '욕설 막말' 주장을 윤 대통령의 순방과 하등 관련이 없는 "국익을 망치려는 자해 행위"라고 규정하며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9월 22일
대통령실 관계자 "거짓말 같겠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귀담아듣지 않았다"
대통령실 관계자 "대통령의 지나가는 말씀... 진위 여부도 판명해 봐야"
윤 대통령의 발언이 있을 당시 측근에서 동행 중이었던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공적으로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누가 녹음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위 여부를 판명해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해당 발언을 두고 '외교 참사'라고 공세를 올리는 야당을 의식한 듯 "사적 발언을 외교 성과로 연결시키는 것은 대단히 적절치 않으며, 힘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데 외교 참사를 언급하는 자체가 상당히 유감스럽다"라고 지적했다.
◎9월 22일
김은혜 "지금 다시 들어보라. '날리면'이라고 되어 있다"
김은혜 "미국 얘기가 나올 리가 없고 '바이든'이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김은혜 "순방 외교는 총칼 없는 전쟁... 짜깁기와 왜곡으로 발목 꺾였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사태 발생 후 15시간이 지난 22일 심야에서야 해명 브리핑을 가졌다. 김 수석은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해당 영상에서 '바이든'을 언급한 바 없고 "국회에서 승인 안 해주면, 날리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했다며 '바이든'이 아닌 '날리면'이라고 해명했다. 김 수석은 야당의 '욕설 막말' '외교 참사' 주장을 "짜깁기와 왜곡"이라 평가하며 "대통령의 외교 활동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동맹을 이간하는 것이야말로 국익 자해 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이 새끼"라는 발언은 존재했으며 그 대상은 "미국 의회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회다"라고 죽도 밥도 안 될 해명을 늘어놓았다. 미국 의회를 "새끼"라고 칭한 것이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하여 자국 국회를 깔고 뭉개자는 어처구니없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대통령의 안위를 위해 집단적 난청을 호소하며 국회를 욕보이기로 한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최고 엘리트 집단인 대통령실의 두뇌에서 나온 대응이 겨우 고작 이따위 것이었다.
◎9월 25일
국민의힘 "민주당 기획 MBC 제작... '정언유착' 진상을 밝히라"
국민의힘 "박홍근 발언 엠바고보다 일러... 어떻게 알았나"
국민의힘 "MBC 추가 확인도 없이 자막 달아... 오보 책임지고 유출 진실 밝혀야"
국민의힘 ICT미디어진흥특별위원회는 25일 윤 대통령 비속어 논란은 모두 더불어민주당과 MBC의 '정언유착'에서 비롯되었다면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위는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는 논란보다 민주당이 보도되지 않은 동영상과 잘못된 발언 내용을 어떻게 알고 정치공세에 이용했는지 밝혀야 한다"라며 더불어민주당과 MBC의 정언유착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고 주장했다.
◎9월 26일
윤석열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한다는 건 국민을 굉장히 위험에 빠뜨리는 일"
윤석열 대통령 또한 출근길 약식 회견에서 "진상이 더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욕설 막말 논란'이 동맹을 훼손하기 위한 악의적 짜깁기와 정치공세라는 인식을 내비쳤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야당이 주장하는 사죄와 관련자 징계 요구를 '진상규명'이라는 뒤가 없는 카드로 반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간에는 윤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주장하는 '진상규명'을 하고자 한다면 윤 대통령 본인이 스스로의 발언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이 파다했다. 부적절한 말은 자기가 해놓고 책임 소재는 외부에서 찾는 전형적인 소인배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도 일었다.
◎9월 26일
국민의힘 "박홍근 제2의 광우병 획책... 모든 의혹은 MBC를 향하고 있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의 전략은 단순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문제의 발언'은 "잘 들리지 않는다"라며 어물쩍 넘어가기로 하고, 이 발언을 최초 보도한 괘씸한 MBC와 악질적 정치 공세로 '제2의 광우병 파동'을 획책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을 때려잡자는 것이다. 뻔히 보이는 원인은 외면한 채 한 손에는 언론탄압의 육모방망이를, 한 손에는 정치탄압의 칼자루를 휘두르겠다는 저열하고 하급한 전략이었다.
◎9월 26일
대통령비서실 "음성 분석 전문가도 특정하기 힘든 발음... 어떠한 근거로 특정했나"
대통령비서실 "한미동맹에 대한 악의적 분석... MBC의 설명이 진상규명의 시작"
MBC "부당한 언론탄압... 정언유착 의혹 터무늬 없고 황당"
MBC "비속어 발언 비판을 빠져나가기 위해 언론사를 희생양 삼아 무자비하게 공격"
대통령비서실은 26일 '욕설 막말' 영상을 최초로 보도한 MBC 문화방송을 상대로 △어떠한 근거로 발음을 특정하여 자막을 만들었는지 △미국이라는 단어를 국회 문구 앞에 첨언한 이유는 무엇인지 △사실관계가 불명확함에도 백악관과 국무부에 악의적 분석을 보낸 배경은 무엇인지 '진상'을 규명하라며 질의서를 보냈다. 언론사의 정당한 보도행위에 대통령비서실이 나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동맹관계가 훼손되고 국익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라는 이유를 들먹였다. MBC는 물론 이에 응하지 않았다.
누구든 살면서 말실수쯤은 한다. 가뜩이나 '말말말'에 둘러싸여 생활하는 정치인이라면 오죽하겠는가. 말실수 한 번 했다고 목숨을 '날리면' 여태껏 살아남은 정치인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국민은 명확히 잘못을 했음에도 뻔뻔하게 잡아떼며 있지도 않은 허상을 향해 쉐도우 복싱을 갈기는 정치인을 바라지 않는다. 국민은 잘못이 있다면 재빠르게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며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의 정치인을 원한다. 국민에게 솔직한 것이야말로 정치인의 제일가는 의무다.
대차고 통 큰 아저씨이자 호탕하고 털털한 보스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2022년 9월은 참담한 달이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