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도구욕심

수첩

by 유자와 모과

아내는 무언가 배움을 시작할 때 가장 좋은 도구나 재료를 준비해놓고 시작한다. 도서관에서 수채화 강좌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물감, 좋은 붓, 좋은 스케치북. 4개월만에 배움을 멈췄을 때 새것 같은 좋은 물감, 좋은 붓, 좋은 스케치북이 남았다. 좋은 것은 대부분 비싸다. 배움을 멈춘 뒤에 남은 도구들은 모두 짐일 뿐이다. 수채화 선생님이 , "실력도 부족한데 도구라도 좋아야지" 라며 싸구려는 쓰지 말라고 했다. 듣고보니 맞는 말이다.

어쨋든 좋은 도구들이 사용처를 잃게되어 어쩔 수 없이 내가 사용하게 되었다. 나의 그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니, 모든 취미 생활자가 그렇듯(넘쳐나는 베이킹도구와 쌓여가는 원단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신혼부부들의 공통된 고민인듯 보인다), 도구 욕심, 재료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케치북을 사고 물감을 사고 볼펜을 사고 또 산다. 유투브를 보며 나도 저 볼펜을 쓰면, 저 종이에 그리면, 저 물감을 사용하면, 비슷하게 그릴수도 있지 않을까 착각에 빠지고 동네 화방으로 산책을 나가곤 하였다. 선을 긋고 색을 칠하며 실력을 키울 시간에 도구를 찾아보고 구입하고 한번 사용하고 또 샀다.


오늘 작은 드로잉 수첩을 구입했다. 이미 수채화용 수첩이 두개나 있고 조금 큰 스케치북과 작게 잘라놓은 종이가 여러 장 있었다. 그래도 작은 수첩이 꼭 필요해 보였다. 구입 후 책상에 앉아 사용하려고 수첩을 폈는데... 여기에 뭘 그리지 싶다. 사용처가 많아야 하는데, 그릴 것들이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어쩔 수 없다. 처음 사용하는 종이이니 종이의 느낌을 테스트하면 된다. 지금 내가 가진 도구들을 그렸다. 연필, 볼펜, 만년필, 수첩, 물감, 붓 등등, 하나만 있는 건 없다. 모두 두개 이상이다. 사용하지도 않는 도구들이 참 많다. 이번 수첩은 한장 사용했다. 그러니 사용하지 않는 도구는 아닌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행사진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