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봐도 저리 봐도 좋은 봄이다.
벚꽃 구경을 가려고 모과가 휴가 냈다.
멀리 가는 건 아니다. 창덕궁에 다녀오려 한다.
집 근처라 마음이 편하다.
어젯밤만 해도 밖에 나가 아침을 먹으려 했다.
일어나니 귀찮다.
그래도 휴가 기분을 내기 위해 평소와는 다른 아침을 차린다.
때마침 먹을 게 많다.
답례품으로 받은 마들렌, 코스트코에서 산 피스타치오 쿠키, 적포도와 칵테일 토마토, 집에서 구운 식빵과 땅콩잼, 원두를 갈아 내린 커피.
식탁이 풍성하다.
때마침 날도 화창하다.
햇살이 벌써 거실까지 들어왔다.
남산타워도 선명하게 보인다.
느긋하게 식사를 즐긴다.
때마침 라디오에는 멋진 음악만 흘러나온다.
우리를 위한 날이다.
베란다에 놓인 식물을 보며 커피를 마신다.
커피나무에 새 잎이 돋았네. 민트도 밤새 자랐구나.
남편이 말한다.
“한 아내가 있었어. 유자라고 하자.
베란다에 빨래 널러 나갔다가 실수로 문을 닫아 버렸어.
갇혀 버린거야. 핸드폰은 방에 있고.
우리 집 샤시는 한쪽 문이 잠기지 않게 설치했다고?
유자네는 옛날 집이라 그런 기능이 없었던 거야.
남편은 어제 출장을 떠났어. 일주일 동안.
모과라고 하자. 모과가 아내한테 전화하지 않겠냐고?
계속 안 받으면 관리사무소나 부모님께 연락할 거라고?
남편은 북극에 희귀한 자료를 수집하러 간 거야. 연구원이거든.
거긴 통화가 안돼.
창문 열어서 도와달라고 소리치면 된다고?
그 아파트는 도시와 떨어진 곳에 있어.
유자가 사는 집은 탑층이고.
바로 앞이 산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지.
한여름이고 휴가철이라 아파트도 휑하고.
유자가 소리쳐도 아무도 듣지 못했어.
다 휴가를 떠나버린 거지.
밧줄을 만들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건 어떠냐고?
물론 유자도 시도해 봤지.
텐트를 찢어 길게 줄을 만든 거야.
밧줄을 난간에 묶은 후 덜덜 떨며 매달렸어.
겨우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집이 텅 비어 있네.
얼마 전 이사를 간 거야. 베란다 문은 잠겨있고.
유자는 간신히 올라왔어.
팔 힘이 빠져 거의 죽을 뻔 했다니까.
베란다 문을 부수는 건 어떠냐고?
물론 그것도 시도해 봤지.
근데 유리가 안 깨져. 안방 유리도 마찬가지야.
창고에 있는 망치로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아.
화분도 던져봤다니까.
유자는 자기 힘이 약해 그런가보다 포기했는데 사실 그건 방탄유리였어.
모과는 연구원으로 위장한 국제 첩자였거든.
이번 출장도 남미에서 비밀 업무를 수행하러 떠난 거였어.
유자는 모과가 올 때까지 베란다에서 지내야만 했어. 다른 방법이 없잖아.
밥은 어떡하냐고?
유자는 창고 문을 열었어.
캠핑용품이 가득했지. 부부가 캠핑을 좋아했거든.
버너, 라면, 햇반, 침낭, 캠핑 그릇, 스팸, 과자가 잔뜩 쌓여 있었어.
드립 커피까지 있었다니까.
화장실은 어떡하냐고?
다행히 휴대용 변기도 있었어.
캠핑족들이 쓰는 거 있잖아.
탈출에 실패한 유자는 배가 고팠어.
버너에 불을 올리고 냄비에 물을 받아 라면을 끓였지.
캠핑용 의자에 앉아 한 입 먹었거든.
근데 그게 그렇게 맛있는거야. 김치만 있었다면 만족할 뻔했다니까.
배 부르니 잠 오겠지.
침낭에 들어가니 잠은 또 왜 그리 달콤하니.
유자는 꿈속에 빠져들었어.
<인셉션>처럼 꿈 속의 꿈 안으로 들어간 거야.
꿈속에서 모과를 봤어.
반가워서 손을 흔드는데 모과가 그러는거야.
자기야. 베란다에서 뭐하고 있어?
유자는 눈을 떴어.
모과가 집에 돌아온 거야.
예정된 임무가 취소된 거지.
유자는 한여름밤의 꿈 같은 하루였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런 얘기는 왜 하냐고?
이렇게 한번 써보라고. 어때?”
며칠 전 ‘더 폴’이라는 영화를 봤다.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가 배경이다.
영화를 찍다 다친 스턴트맨 ‘로이’는 같은 병원에 입원한 소녀‘ 알렉산드리아’와 친구가 된다.
그는 아이에게 무법자들의 모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가 질문하면 이야기는 덧붙여진다. 의문을 제기하면 이야기는 바뀐다.
모과 무의식에 영화가 남아 있나보다.
그릇은 깔끔하게 비워졌다.
공상 여행 잘했다.
이제 소설 그만 쓰고 산책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