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오늘 기온이 뚝 떨어졌네. 우리 교회 차타고 갈까?” 일요일 아침,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담고 성경책을 챙기는 남편에게 말한다. “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걸어서 10분 거리를 차를 타고 가자고?” 남편이 싸늘하게 대답한다.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익숙해지니 이젠 목적지가 집에서 조금이라도 멀면 ‘차를 끌고 갈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뚜벅이 시절에는 도보로 1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는 무조건 걸었다. 가끔 지인들이 그 먼 거리를 걸어 왔냐고 물으면 ‘에이 이 정도는 가깝죠. 평소에도 몇 시간은 걸어 다니는데요.’ 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걷는 게 일상이기에 주말에 남편과 산책을 나가면 몇 시간이고 골목을 걷다 지쳐 쓰러질 때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집 앞 도서관에서 빌린 책 20권(남편에게 할당된 10권을 가족 합산으로 내가 빌린다)을 낑낑대며 들고 가 반납한 후 다시 최대치로 빌려 에코백 두 개에 나눠 들고 헉헉대며 돌아 왔다. 오는 길에 몇 번 가방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기는 했지만 거뜬히 감당할 만했다. 하지만 이제는 몸이 피곤한 날이면 차를 끌고 도서관에 간다. 걸어가면 5분인데 차를 끌고 가도 주차를 하고 나면 5분이 걸린다. 점점 몸이 자동차에 길들여진다. 두 다리와 두 팔이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사치를 누리고 있다. 확실히 신발도 덜 닳는다.
남편이 산책 겸 청계사 입구까지 갔다 오자고 하면 ‘차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1시간 30분 동안 걸어가는 게 합리적일까?’ 하는 생각부터 든다. 산책이 일상이었다면 이제는 따로 시간을 내어 해야 하는 운동이 되어버린다. 차를 타고 다니니 걷는 횟수가 줄어들고 움직임이 덜하니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 40년 동안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기에 내 몸은 타고난 줄 알았는데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예전에는 약속장소가 멀거나 대중교통으로 가기 어렵다면 아예 약속을 잡지 않거나 장소를 조정하였는데 이제는 주차장만 있으면 어디든 간다. 그렇다. 주차장이 있는지 없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외식을 하거나 나들이를 갈 때도 주차장이 넉넉한지 우선적으로 살피게 된다. 뚜벅이 시절 지인들과 모임 장소를 정할 때 누군가 주차할 데는 있냐고 물어보면 의문이 들었다. ‘대중교통으로 오면 되지. 왜 굳이 차를 가지고 그 복잡한 데를 오려 할까?’ 요즘은 누군가 약속 장소를 정하려 하면 나는 주차장이 있는지부터 물어본다. 주차장이 없다면 다른 장소를 제안한다. 버스를 타는 게 점점 귀찮아진다.
운전을 하니 계절도 느끼기 어렵다. 추우면 춥다고 차를 타고 더우면 덥다고 차를 탄다. 차 안에 있으면 태양이 얼마나 뜨거운지 공기가 얼마나 습한지 알 수 없다. 땀을 뻘뻘 흐리지 않아도 된다. 차를 타면 칼바람이 따귀를 때리는 듯 한 얼얼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옷을 잔뜩 껴입고 빙판길을 눈사람처럼 뒤뚱거리며 걸을 필요도 없다. 봄바람과 가을바람은 차문을 열고 닫는 찰나에만 느낄 수 있다. 걷지 않으면 꽃향기를 맡거나 낙엽을 밟을 수도 없다. 자동차가 주는 편리함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예전에는 남편과 산책을 가거나 나들이를 떠나면 가볍게 와인이나 맥주 한 잔을 마시며 경치를 즐겼다. 차를 끌고 다니면서부터는 둘 중 한 명만 술을 마셔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은 유독 음주문화에 너그럽다. 범죄를 저질렀을 때도 술에 취해 있었다면 정상 참작이 될 정도다. 그래서인지 술을 한두 잔 마시고 운전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술을 마신 후 운전대를 잡는 건 미친 짓이다. 음주운전 단속 기준은 0.0퍼센트부터이지만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2퍼센트만 되어도 사람의 감각은 둔해진다. 나는 멀쩡하다고 생각하지만 술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부터 몸은 취하기 때문에 반응 속도가 느려지고 판단력이 감소된다.
남편은 선천적으로 술을 싫어하기에 늘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박박 우긴다. 나는 주량이 적어 맥주 한 병을 시켜도 반밖에 마시지 못하는데 이젠 온전히 내 몫이 된다. 술을 마시고 싶은데 혼자 마셔야 된다는 부담감에 시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얼마 전 과천 관악산에 다녀왔다. 지하철만 이용하다 차를 가지고 간 건 처음이었다. 산 아래 차를 대고 등산을 한 후 주변 식당에서 막국수와 파전을 주문했다. 쌀로 빚은 곡주가 메뉴판에 있길래 한 병 시키려는데 아차, 차를 가져왔지. 한두 잔을 마시기 위해 한 병을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 말았다. 음식이든 술이든 남기는 건 낭비니까. 아쉽긴 하더라. 다음부턴 지하철을 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