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제주사계

제주사계 夏4

남원산책

by 란밀

종일 부지런히 돌아다닌 어제를 뒤로하고, 오늘은 늦잠을 잤다. 오늘 아침은 든든하게 해장국을 먹어볼까, 숙소 앞에 점심이면 재료소진으로 끝난다고 하는 순댓국집이 하나 있다. 오픈 시간 맞추어 찾아가니 아침부터 벌써 농사일을 마치고 와서 한잔 걸치시는 손님들까지 있다. 우리 집 밭에 농약을 치면 어쩐지 옆집 밭에 더 효과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에 웃음이 났다. 시골의 시계는 더욱 빠르게 시작된다. 막창순대로 만든 순댓국은 들큰한게 어찌나 맛있던지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이것이 바로 코리안 브런치 아니겠나.


오늘도 <VEKE>에 들러 정원 산책이나 해야지 버스를 탔다. 남원은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 모두 버스로 금방이라 정말 편하군 콧노래를 부르며 도착했다. 앗불싸, 오늘은 정기휴무. 관광지는 평일에 한적해서 좋지만, 휴일인 곳도 많아 낭패를 보았다. 다시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타고, 마을로 돌아와 너른 정원이 있다고 들은 카페로 향했다. 호텔 베이커리 샵을 방불케 하는 하얗고 높은 모자를 쓴 파티시에가 인상적이었다. 든든한 아침 덕분에 베이커리는 지나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카운터에 다시 가서 까눌레 한알을 추가로 주문했다. 옆자리에 오신 손님은 혼자서 올레길을 걷다가 들어오신 모양이다. 평일 오전이라 너른 가게를 독차지하는 호사도 누렸다. 저녁이나,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을 테지. 우연히 들른 동네인데 걸으며 보는 풍광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래도 너무 더우니까 여름의 열기를 피해 숙소로 이만 철수다.


배드민턴 치는 시골 아이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한참 보다 내려왔는데, 숙소에서 마저 찾아봤다. 이마에 송글거리는 땀을 흘리며 승부에 모든 것을 거는 아이들과 그것보다 서른 해 정도 더 살아온 어른들의 복잡한 속내. 천부적인 재능일 가진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는 빤한 듯해도 왜 이렇게 찡해지고 마는 걸까. 치열한 시절을 살아가는 이야기는 언제 봐도 감동적 이어서일까. 어른이 되면 훨씬 더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줄 알았는데, 어떤 의미로는 꿈도 사랑도 어린 시절이 더 치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온 인생은 고작 한 줌이면서 열정은 몇 배 더 꿈틀대는 시기. 살아온 인생이 얼마 안 되어 올인이 가능한 것일까? 소중한 것들이 늘어나서 어른이 될수록 겁이 더 많아진다는 이야기는 어딘지 변명처럼 들린다. 탱탱했던 마음도 고무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지는 것일지 모르겠다.


태양이 가장 강렬한 오후를 숙소에서 보내고 나니 다시 어디든 나가고 싶어 진다. 지도와 버스 앱을 켜서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을 살펴본다. 렌터카로 여행을 하면 어디든 갈 수 있고, 그 어디든 너무 금세 다다라서 하루에 몇 개의 일정이고 짤 수 있어 혹사하기 일쑤인데. 한 여름 뚜벅이가 되니 숙소에 돌아와서 체력도 다시 채워야 하고, 가까워도 버스노선이 애매하면 찾아가기 망설여진다. 버스 시간표와 내 두 다리만 믿고 용기를 내어 출발해야 하니 정말 흡사 모험처럼 느껴진다. 날씨와 돌아오는 버스 일정까지 한참을 심사숙고해야 떠날 수 있다. 그렇게 고민 끝에 오후의 탐험장소로 고른 곳은 제주시에서 남원으로 오는 버스노선 사이에 있는 물영아리 오름이다.


제주시에서 남원을 넘어오는 버스는 사려니 숲길을 지나 물영아리 오름을 거쳐 남원으로 향한다. 오면서 봤던 그곳을 오후의 목적지로 골랐다. 제주에 몇 해간 머물렀던 친구의 추천으로 몇 년 전에 가본 곳이다. 영화 촬영도 했다고 하는데, 아주 붐비는 장소는 아니라 주차장에 차도 몇 대 없어서 어쩐지 무서웠다. 안내 표지판에도 혼자서 방문은 지양하라고 되어있었던 곳이라 오늘은 오름 위로 오르지는 않고, 너른 풀밭 둘레길만 산책을 하자 마음먹었다. 숙소에서 거리는 제법 되는 곳이지만, 버스로 한 번에 가는 곳이라 20분 남짓이면 도착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지만, 5시가 넘어가니 볕이 더욱 깊어졌다. 늦은 오후라 역시 올라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초록이 가득한 들판을 보며 걷다 보니 덤불에 연두색 동박새들이 숨어있다. 숨어있지만 동그란 아이라인의 이 귀여운 새를 못 알아볼 수가 없다. 저 멀리 깊숙한 곳에 하얀 궁둥이를 가진 노루들이 모여 있었다. 꽤 오래전에는 들판 안쪽도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펜스로 막혀있었다. 한 여름 수국은 모두 진 계절인데 한 두 송이의 산수국이 이제 피어나고 있었다. 이 친구들은 어쩌자고 이렇게 늦은 계절에 피어나는 것일까.


한 시간 남짓 산책을 하고 나니 돌아가는 버스가 곧 올 시간이라 부랴부랴 걸어 나왔다. 고요한 둘레길에서 조금 걸어 나왔을 뿐인데, 큰길로 나와 버스를 기다리다 보니, 차들이 내는 소음이 굉장했다. 이 소음이 계속 들려오던 것이 맞나, 자연 속에 잠겨있다 나오니 이제야 귓가에서 거슬린다. 버스 정류장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차들이 유독 쌩쌩 달린다. 사람도 이렇게 무서운데, 동물들은 이 도로를 건너야 할 때면 얼마나 두려울까. 모두가 차가 있는 길에 혼자 서서 버스를 기다리다 보니, 순한 야생동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런 생각들을 금세 멀어졌다. 사람은 대개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이기 마련인데, 어떤 이들은 자신보다 작은 존재들을 위한 권리에 진심과 혼신을 다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시계를 보니 이제 해가 질 시간이다. 버스에서 내려 해안도로를 걸어가면 일몰 시각에 딱 맞겠다, 마음이 흡족했다. 오늘은 제법 맑아서 근사한 저녁노을을 기대해 본다. 바닷가로 걸어가니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급하게 사라지고 오늘은 핑크빛 저녁하늘에 떠오른 둥근달이 주인공이다. 어디선가 태풍이 올라온다는 것도 같고 파도가 제법 거칠다. 남원 해안도로를 며칠 거닐다 보니 이 곳만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는 관광객들도 제법 와서 사진을 찍고 있지만, 아침저녁은 주로 동네 주민들이 나와 강아지와 산책을 한다거나 운동삼아 산책도 많이 하신다. 그런 분들이 대부분이시긴 한데, 가끔 트럭을 세워놓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중년의 아저씨들이 있었다. 텅 빈 바다를 한참이고 바라보는 남자 어른들이 낯설었다. 소주병도 담배도 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숨을 쉬는 것일까, 위로를 받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길 한편 공터에는 동네 개들, 들개라고 부르기엔 온순하고, 누군가의 반려견이라고 부르기엔 자유로운 존재들이 모여 지냈다. 가끔 낯익은 사람이 지나가면 어쩐지 따라가다가, 대개는 자기들끼리 뒹굴대며 장난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닷가의 고양이들은 해녀들이 모이는 장소와 오징어를 구워서 파는 점빵 앞에 자주 앉아있었다. 대개는 자기 자리를 지켜 혼자 있었다. 8시가 넘으니 해가 완전히 넘어가 캄캄해졌다. 밤이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도 내려앉았다. 걸어서 금방이면 숙소에 들어갈 수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낯선 친구들이지만 혼자 지내지 않아도 되어 따뜻했다. 우리 두 친구들은 저녁을 먹었을까? 내일은 어디든 관광을 가는지 귀찮게 참견도 해봐야지.


종일 혼자 보내서 사람이 그리웠을까, 돌아온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이 반가웠다. 노란 머리 친구들은 핑크 & 그레이 헤어로 변신해 있었다. 내일은 우도에 놀러 간다고 숙소에서 셀프 염색을 했다고 한다. 레드벨벳이 따로 없구먼, 웃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염색이었는데, 휴가를 핑계로 도전해봤다고 한다. 쇄골 어딘가 문신도 있고, 화려한 네일까지 붙인 친구들은 미용일이라도 하는 걸까, 마음속으로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무슨 옷을 입고가지 이것저것 옷을 꺼내와 입어보며 수다를 떨었다. 여자들의 밤이란 이런 것이지. 슬슬 돌아가는 날도 다가오고 하니, 내일 저녁은 치맥이라도 함께 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사실 냉장고에 커다란 벌크의 하이네켄 맥주가 있었는데, 휴가에 꼭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제주시 마트에서부터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고 한다. 동네 닭집 전단이 어디 있었는데, 내일은 저녁은 저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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