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제주사계

제주사계, 夏3

남원해안도로, 공천포 바다, 신흥리 오솔길

by 란밀

여행을 오면 어째서 그렇게나 부지런해지는지 6시도 되기 전에 눈이 번쩍 떠진다. 어제저녁부터 하늘에 구름이 제법 있어, 오늘도 선명한 일출을 보기는 어려울 테지만, 그래도 오늘자 하늘의 모습이 궁금해 신발을 신고 나선다. 오늘의 하늘은 어쩐지 천지창조처럼 웅장하다. 거대한 뭉게구름 뒤로 햇빛이 쏟아지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내가 화가라면 이런 장면을 그리고자 했겠군 생각했다. 걷다 보니 하릴없이 자유로운 동네 들개들도 마주치고, 목줄을 한채 주인과 산책하는 리트리버도 만났다. 주인아저씨는 동네 카페 사장님 같은데, 아무래도 오픈 전 시간에 산책을 하는 가 보다. 오늘 아침은 숙소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걸어보았는데, 오른쪽보다 황량한 길이 밋밋하여 큰엉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산책로로 다시 향했다.


멀리 바다에서 거뭇 거리는 게 해녀인가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글쎄 돌고래가 아닌가! 돌고래는 서쪽 대정 앞바다에 자주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남원 앞바다에도 오는구나. 너무 신나서 아침 운동 중이신 동네 주민들에게 나도 모르게 말을 걸고 말았다. 저기 돌고래가 왔어요! 모두들 걸음을 멈추어 서고 바다를 한참 보았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저들은 대정 앞바다로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일출이 아니더라도 아침 산책 덕분에 이런 행운을 누리는구나, 행복이 가득 차오른다. 몇몇 분들은 돌고래의 출연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냥 걸어가신다. 어쩌면 알면서도 그분들에게는 그저 흔한 일상이라 걸음을 재촉하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오늘은 남원에서 가까운 공천포 앞바다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전에 위미의 한 펜션에서 며칠 묵으면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카페는 외관은 수더분한데 안에 들어가면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바다풍광이 있었다. 버스로 20분 정도 공천포에 내렸다.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에서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 커다란 아름다리 나무가 하나 자리 잡고 있다. 나무 아래 가끔 동네 어르신들이 앉아계시던에 오늘은 이른 시각이라 아무도 안 계시네.


오랜만에 와도 참 좋구나, 바다를 마주하고 앉아 카페에 놓인 책을 살펴보았다. 제주에 내려와 새 가정을 꾸리고 카페를 운영하며 쓴 에세이가 있어 재밌게 읽었는데, 책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을 때쯤 사장님께서 엊그제 그분의 폐업소식이 들려왔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누군가의 시작을 읽자마자 끝을 알게 되어 마음이 묘했다. 삶은 계속되니까 한 권의 책으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모두에게 힘든 계절이구나, 그럴 테지. 그분의 소식이 그래도 궁금해져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시 서울로 돌아와 또 새로운 출발을 준비 중이셨다. 타인의 일상에 너무 과도하게 궁금한 마음을 갖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어색하게 책을 내려놓고, 손님들이 적고 가신 방명록을 펼쳤다. 사람들의 이런저런 즐거운 시간들을 넘겨보는 일도 즐거웠다. 어느 커플이 주거니 받거니 쓴 글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곧 죽는 걸까. 요즘 너무 행복하다."-"다시 한번 이곳에 오고 싶어." 손글씨에 어쩐지 생생한 마음이 느껴졌다. 나도 한 페이지 글을 남겼다. 무슨 이야기를 썼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카페 옆 유명한 물회집에서 된장 베이스의 시원한 물회 한 그릇을 했다. 점심이 되니 해가 이글 거리네.

오후엔 숙소 사장님이 운영하신다고 놀러 오라고 하신 공방을 찾아가 보자. 신흥리라는 작은 마을 올레길 길목에 있다는데, 초행길이라 버스로 찾아가는데 조금 어려웠다. 한여름의 녹음을 내뿜는 울창한 나무들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오솔길에 핑크색 지붕의 공방이 나타났다. 전형적인 제주 시골 돌창고를 개조한 공방은 사장님이 그림수업도 하시는 작은 아뜰리에였다. 공방 옆에 제법 잘 되는 카페가 하나 있다고 하시어, 들러보기로 했다.


이곳도 돌창고, 귤저장고를 개조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카페 옆 부지에 정말 귤밭이 아직도 남아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조금 어두운 실내를 화려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조용한 사장님 내외분 덕분에 혼자 찾아가 책을 읽기 좋은 곳이었다. 실내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안내문도 있었는데, 그 덕분에 왁자지껄 즐거운 단체 손님은 못마땅하다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고 들었다. 제주의 이런 시골마을에서조차 장사는 당연히 어려운 일이군. 가게의 주인은 사장님이지만, 사장님도 내 마음대로 하기 힘들구나.


오늘은 몹시도 맑아서 저녁 수영을 하러 다시 태웃개로 향했다. 숙소에서 간단히 비치타월만 챙겨서 이제는 한번 가봤다고 더 익숙한 길을 오늘은 혼자서 걸었다. 날은 맑은데 바람이 제법 세어 바닷속은 멀리 보이지는 않았다. 저녁시간이 되니 하루 일과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서 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핀과 마스크까지 차고 제법 전문적인 모습으로 입수하는 제주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 여름 이 섬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유희 아닐까. 수면에 동동 떠서 흘러가는 대로 누워 해가 지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는 여기서 나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흘러갔다. 바다에서 물 위에 떠있을 때면 매끄러운 해수면과 내 몸이 일치되는 장면을 상상한다. 우주의 먼지가 지구에 완벽히 흡수된 순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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