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제주사계

제주사계 夏 2

해가 뜨고 해가 지고

by 란밀

사는 동안 일출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적 있다. 여행지에 가면 나의 주된 일과는 해바라기, 일출과 일몰을 쫓는 일이다. 탁 트인 바다에서 매일 일출과 일몰을 봐야지 몹시도 기대하던 차였다. 그래서 숙소의 필수 요건은 바닷가 도보거리였다. 여름이라 일출시각이 너무 이르지만 우리 인체의 바이오리듬도 그에 맞춰지는 법이니 여름은 더욱 오래 놀 수 있어 좋은 계절 아니겠나,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옆방 친구들은 나의 인기척마저 눈치채지 못하는 깊은 꿈나라다. 5시 반쯤 바로 나오려다 어젯밤부터 오락가락한 비 덕분에 하늘이 흐려 일출은 포기다 생각하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멋지게 떠오르는 태양은 없지만 탁 트인 바다에 가득 찬 구름도 장관이었다. 해안도로를 주욱 걸어가니 큰엉산책로로 이어졌다. 흐린 날 새벽이라 인적 드문 산책로가 가끔은 무서웠지만, 날이 점점 밝아오는 아침이 되니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비에 흠뻑 젖은 여름을 머금은 나뭇잎들이 싱그러웠다.


숙소에 돌아와서 어제 동네 슈퍼에서 미리 사둔 식빵 한쪽과 여름 자두, 그리도 드립백으로 내린 커피를 마셨다. 낯선 곳에서의 첫 아침식사지만 서울에서와 다를 바 없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옆방 친구들은 오늘 뭐할 건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아직 곤히들 자고 있어 조용히 외출을 준비했다. 남원 생활 첫 방문지는 바로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VEKE>. 우연히 일전에 소개받아 찾았던 곳인데 여름의 그곳은 또 어떨지 기대되었다. 평일 오픈 시간 맞추어 가면 고즈넉한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겠지 싶어 아침부터 달려갔다.


밤새 소나기가 휩쓸고 간 여름 아침의 <VEKE>는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촉촉한 물기로 녹색은 더욱 짙게 반짝거렸다. 다양한 꽃나무들도 이곳의 매력이지만, 흐린 날도 이곳을 기대하게 하는 참 매력은 바로 실내 카페에서 내려다보이는 이끼정원이다. 몇 시간에 한 번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수분을 공급해주고 있는데, 오늘 같이 절로 촉촉한 날이면 이끼들이 더욱 신나 보인다. 이른 아침이라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분들 뒤로 내가 두 번째 손님이었다. 서가에 꽂힌 정원에 관한 책들을 살펴보다 <자연정원을 위한 꿈의 식물>을 꺼내왔다. 이곳에 심어진 낯선 꽃나무들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있어 한참 빠져들어 읽었다. 여름 베케 정원의 꽃나무는 목수국이 절정이고 루드베키아, 에키놉스와 같이 사막 분위기 물씬 나게 하는 녀석들도 한창이었다. 제주는 습한 기후긴 하지만, 아마도 물 빠짐이 좋은(논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은) 토양 덕분에 이런 이국적인 수목들도 잘 자라나 보다 생각했지만, 이 더운 날에 한켠에서 가드닝을 하고 있는 직원들을 보다 보니 역시 아름다운 것들은 그냥 자라지 않지 끄덕거리고 말았다. 이제 슬슬 점심을 먹으러 가볼까, 어디든 걸어서 가고 싶어 네이버 지도 앱으로 도보거리 일본 가정식 식당을 찾았다. 사람만 너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운 음식에 쥐약이라 달짝지근한 일본음식들을 좋아했다. 기회가 닿아 일본 가정식 요리를 지난 몇 개월 배웠는데, 다시 국물 내는 것과 튀김에 지쳐버렸다. 그래도 오늘은 남이 해주는 요리니까 신나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평일이라 다행히 웨이팅 없이 자리에 앉아 매실 소다와 새우 카레를 주문했다. 새우의 녹진한 향이 부드러운 크림카레에 가득하다. 달짝지근한 야채 절임과 샐러드도 너무 향긋하군. 이제 배도 채웠고 슬슬 숙소로 돌아가서 한낮의 열기를 피해볼까. 숙소는 버스로 20분이면 충분하네, 안심이다.


숙소에 돌아오니 그제야 두 친구들은 일어나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기다랗고 하얀 피부의 노란 머리 친구들은 서로 닮아서 자매라고 생각했는데, 학교 친구들이었다. 저게 요즘 친구들 유행하는 스타일인가 그런 생각도 해보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어 한참을 바라봤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마당 테이블에 나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날이 너무 좋아 아무래도 좀이 쑤셔 집앞 바다로 다시 산책을 나왔다. 앗불싸, 저 멀리 바다 끄트머리부터 시커먼 먹구름들이 들어오네. 여름의 열기가 너무 강렬했나 보다. 호다닥 도망치듯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데 소나기가 또 시작되었다. 언제쯤 맑은 하늘이 보이려나.


저녁은 집 앞 사거리의 피자집이다. 스페셜 피자. 정겨운 이름을 한판 주문해서 숙소의 친구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다. 친구들은 한 달간 나보다 더 길게 머무르고 있다는데 그래서인지 어디도 나가지 않고 느긋한 것일까.

코로나로 취업도 쉽지 않고 모든 것들이 어려워진 시기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어디서 푹 쉬고 싶었다는 두 친구들은 그래서 여기서 그렇게 오래도록 자는 것일까, 여름 해는 8시가 다 되어야 진다. 지는 해를 보러 다시 해안도로를 달려 나갔지만, 오늘도 뭉게구름 덕분에 일몰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핑크 구름과 반달이 너무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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