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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Dec 04. 2022

누군가의 추억 (上)

〔커피값 프로젝트〕 초봄호 2002. 26. Fri.


난데없는 월요일에 동네 언니의 집에서 눈을 떴다. 그는 전포동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 9층에 산다. 나는 전포동에 살지 않는다. 괘법동에서 전포동에 가려면 40분 동안 버스에 몸을 실어야 하지만 우리는 아는 언니라는 호칭보다는 조금 더 친한 사이인 것 같으므로 나는 그냥 그를 동네 언니라 칭하기로 한다. 동네 언니의 진짜 동네 동생은 일어나야만 하는 최후의 시간에 일어나 울며불며 출근을 했다. 나는 그가 우당탕탕 휴대폰을 찾아 출근하는 모습을 언니네 고양이와 함께 지켜보다 눈곱을 겨우 떼고 테이블에 앉았다. 언니네 집에서 원목으로 된 커다란 테이블에 앉으면 왼쪽에 난 통유리 창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한사코 사양했으나 내밀어진 결명자 차를 홀짝이며 남들의 출근길을 구경했다. 파인애플 같은 머리를 하고서 나는 말했다.


언니. 호주에서는 이 시간에 일 층 카페에 가면 아침 메뉴를 팔았거든.


언니는 이제 경전이 되어버린 주식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처럼 일찍 일어나서 아침 바람 냄새를 맡으면서 카페에 가는 거지. 스크램블 에그랑 베이컨, 빵이랑 버터, 구운 토마토 같은 것들이 한 접시에 나오는데, 따뜻한 커피랑 곁들여 먹으면 진짜 좋거든.


음....... 맞나.


나는 씻지도 않은 채로 창밖을 내다보면서 여유롭고 생산적인 삶에 대한 선망을 표했고 언니는 성심성의껏 들어주려 최선을 다했다. 여유롭고 생산적인 삶에 대한 선망이 어찌하여 내게서는 구운 베이컨으로 발현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나는 계속해서 베이컨 타령을 했다. 계속 말하다 보니 진짜로 베이컨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그런 일상이 진짜 좋았는데 말이지. 이른 아침에 나가서 여유롭게 카페에서 식사하는 것. 출근 걱정 하지 않고 말이야.


대인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지리멸렬한 발화를 갈무리하기 위해 안전한 주제를 꺼냈다. 지나치게 감상에 빠진 것이 민망해지거나 마주앉은 사람과 할 말이 없을 때는 언제나 여행 이야기가 제격이다. 그래서 결론은 여행을 가고 싶단 말이야, 말하자 언니는 창밖으로 보이는 사거리 스타벅스 이야기를 했다. 역병이 터지기 전에는 이른 아침이면 저 커피집 앞에 정차한 빨간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린 중국인 여행객들이 모두들 커피를 한 잔씩 하며 하루를 열곤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나의 선망은 이제 중국인 관광객에게로 넘어갔다. 봐봐, 그 사람들도 카페에서 아침을 시작하잖아. 정말 부럽다, 그치? 그날은 비논리적으로 내 처지가 서러워지는 그런 날이었다. 언니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네가 관광버스를 탈 날은 앞으로 무지하게 많을 거란다...


우리의 대화는 본격적으로 여행으로 튀었다. 나는 계속해서 언니의 주식 공부를 방해하여 나와 놀아주도록 유도하고 싶었다. 언니는 넘어가주었다. 그의 첫 나홀로 해외여행은 리스본이었다고 했다. 그는 리스본을 마치 사전답사 하듯 여행했고 실제로 일기에 다음에 다시 오면 진짜 잘 놀 수 있을 것 같다고 썼으나 그는 두 번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앙마이를 여행하면서도 그는 일주일 뒤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것이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치앙마이 여행이 되었다. 언니의 이야기는 그날의 이유 모를 절망에 좋은 구실이 되었다. 나는 그 덕에 실체 없는 것에 대해 마음껏 안타까워할 수 있었다. 실체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외국에 살적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 부지런 따위 떨어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건 그냥 망상에 불과했다.


나는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카페 문을 열고 커피를 팔아야 하는 노동자였고, 카페에 앉아 느긋한 식사를 한 건 내가 일하던 카페의 손님들이었다. 나는 그 옆 커피머신 앞에서 째지게 하품하며 그들의 출근시간을 가늠해보곤 했었다. 그러니까 그건 추억이 아니라 나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의 열망은 종종 그리움의 형태로 찾아오곤 하므로 나는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에 대해 자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건 너무도 간절하고 격렬해서 정말로 가슴 미어지는 환상통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가끔은 단순히 그리운 감각을 갖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감각을 좇아 자꾸만 낯선 곳으로 떠나가듯이, 내게 아는 감각이 되어줄 낯선 것을 또 다시 찾고 싶은 것일지도.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것들을 그리워하느라 늘 앞의 사람을 두고 창밖이나 내다보게 된다. 언니는 말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그리워질 날도 분명 올 거란다...



김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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