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빈 Nov 25. 2022

10월의 어느 맑은 점심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마주치는 것에 대하여*

10월의 어느 맑은 점심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마주치는 것에 대하여*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저 사람과 내가 사귀게 될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당에서 커피 내리던 남자는 길 가다 마주친 저 여자와 사귀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 조소를 그의 확언과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바친다. 만일 그가 윤종신의 환생을 멋들어지게 부른 비비였거나 비에 젖은 모습이 훌륭한 티모시 샬라메였다면, 때마침 그 골목 지나간 그 여자가 다만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비비도 티모시 샬라메도 아닌 그냥… 적당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파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를 그에게 미리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한낱 놀림거리로 당신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허락 없이 그의 이야기를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은 정말로, 그저 그를 놀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런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주 미미할 뿐이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가져다 쓰는 건, 시월의 어느 맑은 점심에 불현듯 그를 이해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음 강의까지 단 15분, 평소라면 서둘러 걸었을 시간에 하필 배짱을 부리며 카페에 들렀을 확률과, 때마침 원래 앉던 자리가 가득 차 창가에 자리를 잡았을 확률, 그날따라 주문이 밀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유리창에 기대 책을 읽었을 확률, 그러다 마침 눈을 들었는데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을 확률에 대하여 구태여 핏대 세우지는 않겠다. 수에 능한 누군가는 굳이 계산해보는 수고를 들이고서 그것 별 일 아니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문과는 문과의 장점을 살려 낭만적 의미화에 집중하겠다. 이럴 때 아니면 삶에서 유용하게 쓰일 일이 그다지 많지는 않으므로. 


 엄정한 객관성에서 얼마간 비켜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문과의 장점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잘 하는 것을 해보겠다. 내가 그날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카페에서 만날 일 없던 사람을 만난 것은, 말하자면 우주의 헛기침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와 나는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그는 물론 이 세계관에 동참하겠다고 한 적 없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문과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지독한 주관이다-으로서, 드라마 작가라는 거대한 힘이 부리는 기교에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된 거라는 말이다. 인물들은 글쎄, 어느 정도 제멋대로 행동하려고 애써볼 수는 있겠지만, 그 헛기침은 어찌되었든간에 그들에게 도착하도록 되어 있고, 그들의 등은 그 입김에 떠밀려 정해진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날 그곳에서 그를 보고 눈을 빛냈던 것도 다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가령, 아까 본 그 여자 곁에 놓인 책이 <공산당 선언>이었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마음을 빼앗긴 것도……. 


 그렇다. 나는 그만 보고 만 것이었다. 카운터에서 텀블러에 담겨 나온 커피를 받아 자리로 돌아가는 동선은 하필 그를 지나치게 되어 있었고, 그가 오른손 옆에 둔 <공산당 선언>은 하필 2018년 리커버판의 강렬한 붉은색 표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지금 그를 지나치는 찰나의 순간 동안 눈 흰자로 그 표지에 적힌 제목을 읽은 음침함을 고백함과 동시에, 붉은색에 끌리는 건 인간의 본능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른편에는 붉고 조그마한 책을 두고 한 손에는 검은 전자책 단말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왼편에는 하필 내 것과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든 것은, 그가 때때로 입가로 가져간 커피가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나 매장용 유리잔이 아니라 그의 텀블러에 담겨 있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절대로 스타벅스라는,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 선 굴지 기업의 텀블러여서는 안 되며, 물 건너 온 스탠리나 킨토여서도 안 되었다. 그는 모 찻집에서 받은 듯한, 트라이탄 소재의 투명한 텀블러에 커피를 마셨다. 그걸 알아채고 나니, 그가 쓰는 일기장이 몰스킨이나 로이텀, 혹은 문구광이 좋아한다는 미도리 노트가 아니라는 점도 특별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화려한 꽃무늬의 일기장을 쓰지 않을 테지만, 누군가의 특별함을 알아보는 일에는 개인적인 취향과의 불일치가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의 길고 곱슬거리는 머리칼과 마치 입고 태어난 것 같은 옷차림에 대해서까지 구태여 더 나불거리지는 않겠다. 


 그를 관찰하는 동안 분침은 수돗물같이 쏟아져서 내가 카페를 나서야 할 시간은 이미 손끝에 닿아 있었다. 이제 도서관에서 책 한 권 빌려 강의실로 달려 가야만 했다. 나는 조급해졌다. 이곳이 교내 카페이고, 그는 아마 나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며, 카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음과 더불어, 내가 그 몇 분동안 그가 읽는 책 제목과 텀블러까지 관찰한 음침한 사람이라는 사실들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곤란함의 결은 카페에서 한눈에 그를 발견한 사건이 내게 선사한 곤란함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러나 이미 강조했듯 등 뒤로 불어오는 헛기침의 영향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었으므로, 나는 가지고 다니던 수첩의 맨 뒷장을 찢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해서요. 괜찮으시면 다음에 커피를 한잔 하면 좋겠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런 개수작을 부렸다. 여기서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의 짧은 인생에는 수없이 많은 개수작들이 있어 왔으나, 이번의 개수작은 의도와 달리 해석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이 달랐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가 얻는 것이고, 그 경구는 이런 이름 모를 마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나는 저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망 하나만으로 우선 갈겨 썼으나, 문제는 이 일련의 행동이 보통의 개수작과 모양은 같고 의도는 다르다는 데에 있었다. 10월의 어느 맑은 한낮에 들른 카페에서 모르는 여자로부터 쪽지를 건네 받을 여자의 심정을 가늠하기란 나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나로부터 당연한 듯 쪽지를 받아 챙기고서 세련된 태도로 인사를 건넬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쪽지 아래에 전화번호 대신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써 넣었다. 그가 나에 대한 정보를 미리 획득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게시물들을 훑어보고 영 미친놈인지 그저 새 친구-아직 친구가 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에게 눈을 빛내는 중인지 판단하고서 내게 연락을 할지 말지 결정하면 될 거였다. 이 상황은 세간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수상하게 여겨질 것이므로 나는 혹시 모를 그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고, 그런 와중에도 이런 세상의 편견에 약간의 애석함을 느꼈으나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목적을 이루고 이제 어서 나를 기다리는 교수의 품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로부터 2주 뒤에 서촌의 한 다방에서 그와 다시 마주했다. 나는 교내 카페에서 그를 본 순간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로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감했었고, 알고 보니 그도 그날 내 예상보다 많은 것을 예감했었다. <공산당 선언>을 보고서 쪽지를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비슷한 결을 가졌을 것임을, 그리고 ‘쪽지‘를 주었다는 점에서 내가 양쪽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임을. 그의 눈동자는 단정했고, 그와 동시에 세상을 꽤나 정확하게 볼 줄 알았다. 가지런한 눈빛은 언제나 곧은 선으로 닿기 마련이므로. 


 어떤 바람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건 종종 예감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와 헤어지고 잡아 탄 버스에서 나는 더 짙은 예감을 했고, 그날은 그것이 단지 예감의 옷을 입고 있을 뿐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더 이상 사당역에서 커피 하던 남자의 말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김수빈

매거진의 이전글 글을 잘 쓰는 방법 (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