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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May 15. 2024

예술가와 외설가의 만남

커피값 프로젝트〕 2021. 02. 05. Fri. : 예술가와 외설가의 만남



고등학교 담임선생님과 만났다. 얼마 전부터 교육 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원고료를 받는 아마추어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시를 쓰고 나는 커피값을 번다. 시를 쓴다고 하면 한 문장만으로도 문학 하는 멋쟁이 시인이 되는데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여러 사람을 가져다 팔았다. 일간 이슬아라고 아세요? 모르시는구나. 그럼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고 아세요? 내가 하는 일이 사랑하는 선생님 앞에서 최대한 그럴 듯해 보이도록 여러 가지 부목들을 가져다 대어 보려 했지만 메일링 프로젝트 시대의 도래를 모르는 이에게는 그런 인기 작가들의 이름이 애초부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슬아와 이민경의 이름 뒤에서 한층 초라해진 김수빈의 커피값 프로젝트를 그냥 소개했다. 커피값 받고 일주일에 글 세 편 보내준다고 했다. 실은 커피머신값 정도 벌고 싶다고 덧붙였다. 업소용으로.


그 다음이 진짜 난관이었다. 시인은 테이블에 팔꿈치 괴며 관심을 보였다. 무슨 글 쓰냐고 물었다. 너 또 야한 얘기나 하는 거 아냐? 그랬다. 과연 고등학생 때부터 쌓아온 나의 명성이란. 무슨 글 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야 많겠다. 연애 이야기 연애로 안 이어진 사랑 이야기 사랑 나눈 이야기 좋아하는 친구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것 본 것 느낀 것 들은 것. 그냥 내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내 몸을 스쳐간 것들과 나와 연결된 세상에 관한 이야기 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 여자다. 이 모든 소개말들에 ‘여자랑’이 빠졌다. 그걸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언젠가 3학년 학생이 이대 숙대 원서 넣으며 여자 삼천 명 사귈 생각 하니 행복하다고 말했다며 낄낄거린 적 있으니 나도 지금 이 순간 자연스럽게 끼워 넣어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와 나 사이 거리 재고 눈에 깃든 기색 살피느라 타이밍 놓쳤다. 야한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건 맞는데 그런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대답하고 초등학생 시절 교실에서 섹스신 읽은 이야기 한 글 한 편 보여드렸다.


시인과 나는 마주앉아 서로가 쓴 글을 읽었다. 너는 문장이 참 좋구나 집중하게 하는 무언가 있어. 선생님은 표현이 참 좋으시네요 교사 에피소드로 에세이를 쓰거나 팟캐스트를 해보는 건 어떠세요. 그럼 나도 섹스 칼럼 같은 걸 써볼까. 둘이 아주 잘 놀았다. 습기 가득한 읍내 이디야 구석자리에서 사제 간이고 뭐고 낄낄대며 떠들었다. 시인은 다른 학생을 만나면 아기 같고 상담 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날 만나면 친구 같고 그래서 야한 이야기나 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이게 다 내가 예의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덧붙였다. 나는 기실 내가 학교에서 가장 예의 바른 학생인 줄 알고 살았기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그가 내게 저녁으로 코스요리를 사주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그만의 어떤 애정표현이겠거니 넘겨짚었다. 아기와 친구의 간극 사이에서 얼마간의 우월감이 배어나온 것도 같다. 그 앞에서 어리광 부리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테이블에 앉은 모르는 사람들의 대화에 정신 팔려 있다 고개를 돌렸을 때 나를 진득하게 바라보던 눈과 마주쳤다. 나를 관찰하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눈을 발견하기를 수차례, 무슨 생각을 하느냐 물으면 그는 매번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시인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겠거니 스스로를 집착의 늪에서 구해냈다. 시인은 불현듯 말했다. 그럼 오늘은 작가와의 밤이네. 정말 그런 셈이네요. 에세이 원고료 버는 시인과 커피값 버는 제자의 만남이요. 시인은 무슨. 저는 예술보단 차라리 외설에 가까우니 외설가 할게요 선생님이 예술가 하세요. 시인은 좋아하는 시를 몇 편 보여주고 집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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