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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oreal Oct 07. 2024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

그 예쁜 날개로 언제든 우리 창가에 앉을 수 있게

  크리스틴. 이 이름을 가진 소녀가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 부른다. 심지어 학교 연극반 지원서에도 그렇게 쓴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 <레이디 버드>의 이야기다.





<레이디 버드> 영화 포스터

  


  넷플릭스를 오랜만에 켰는데, 10월 15일까지만 볼 수 있다며 이 영화를 추천했다. 처음엔 '레이디 버그(Ladybug)'라고 잘못 읽었다가, '레이디 버드(Lady Bird)'를 보게 되었다. 사실 이 영화를 선택한 건 순전히 충동적이었다. 보통은 많은 작품을 찜해두고도 쉽사리 보지 못한다. 인내심과 책임감으로 끝까지 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맡은 시얼샤 로넌도 특별히 관심 있게 보던 배우는 아니었다. 그런데 넷플릭스의 소개글을 보니 왠지 궁금증이 생겨 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레이디 버드> 넷플릭스 미리 보기

 



 영화 소개글을 읽으며, 문득 오래전에 가르쳤던 한 아이가 떠올랐다. 친구들에게 다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던 그 깜찍한 다섯 살 아이 말이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똑 부러졌다. 당시엔 그런 모습이 낯설고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이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몇 년 뒤, '이름'을 주제로 부모참여수업을 했다. 그때의 경험은 우리가 이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아이들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조사해 보니, 부모님이나 조부모뿐만 아니라 목사님이나  철학원에서 지은 경우도 있었다. 이름에 담긴 부모의 고민과 기대가 느껴졌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 어떤 말을 자주 하는지 물었더니, 한 아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심부름이나 동생 돌보기를 시켜서 싫다고 말이다. 아이의 거침없는 고백에 수업을 참관하는 부모님들 모두 웃었지만, 그 말속에 담긴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수업에서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이란 그림책을 소개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개구리 이야기로, 다른 동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길어지는 이름을 갖게 된다. 자신의 이름도 모른 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개구리가 다른 동물들을 만나 호감을 느끼고, 비슷한 점을 찾게 되면서 이름에 이름을 덧붙이게 된다. 카멜레온은 혀가 긴 것을 보니 카멜레온인 것 같다고 했고, 메뚜기는 뜀박질을 하는 것을 보니 메뚜기인 것 같다고 하면서 이 개구리는 그렇게 동물들을 만나다 보니 '카멜레온메뚜기거북앵무도마뱀갈라고'라는 긴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이 우스운 이야기 속에는 자아 발견의 여정이 담겨있어, 웃음과 함께 가슴 한편에 짠한 마음이 든다. 나는 아이들에게 새 이름을 지어보라고 했다. 그것은 단순한 작명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희망을 표현하는 기회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바람들을 누가 기억할까? 고등학생이 된 그들도 잊었을지 모른다.


"이름부터 그렇잖아. 우리는 왜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의 기대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걸까? 그 기대가 담긴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때,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지금에 와서야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주인공은 크리스털을 연상시키는 크리스틴이란 이름 대신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스스로 짓는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한 변덕이 아닌, 자아를 향한 열망의 표현이다. 오디션에서조차 새 이름을 고집하며, 본명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빛난다. 레이디 버드의 가정 형편은 넉넉지 않다. 어머니는 헌신적인 간호조무사로, 아버지는 실직 위기에서 묵묵히 프로그래머로 일한다. 아이비리그를 나왔다는 오빠마저 피어싱 한 여자친구와 함께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레이디 버드는 경제적 부담이 큰 동부 대학 진학을 꿈꾼다. 그녀의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그 열정만큼은 식을 줄 모른다.

  엄마가 가정 형편을 말하며 경제적 압박을 토로할 때마다 레이디 버드의 반항은 더욱 거세진다. "널 키우는데 얼마나 드는지 알아?"라는 어머니의 한탄에, 그녀는 "얼마냐고! 그럼 더 커서 돈 많이 벌면 그동안 빚진 거 갚고 인연 싹 끊어버릴 테니까!"라며 노트를 내밀면서 소리친다. 썸 타기 시작한 남자친구 할머니의 근사한 집을 보고 희망에 부푼 레이디 버드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마치 자신이 그 집의 안주인이 된 듯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꿈은 곧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동부 대학에 가겠다는 마음으로 레이디 버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출발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대한 등록금이 필요한 동부 대학 웨이팅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아빠에게 학비지원 신청을 받아달라고 조른다. "엄마와 상의해봐야 해."라는 아빠의 말에도, 그녀는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면서 "미리 알아서 싸울 필요 없으니까."라고 말한다. '딸바보'라고 이마에 쓰여있는 아빠는 이런 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우리 집에도 이런 아빠와 딸이 있다.(⊙_⊙;)).

  레이디 버드의 모습에서 철없음과 순수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녀는 좀 더 멋져 보이고 싶어 한다. 프롬 파티를 위해 쇼핑몰에서 옷을 고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라는 레이디 버드의 말에 엄마는 "너무 핑크 아냐?"라고 말한다. 그 순간 레이디 버드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친다. "그냥 예쁘다고 해주면 안 돼?"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레이디 버드는 말한다. "난 그냥 엄마가 나를 좋아해 주면 좋겠어."라는 그녀의 말에 엄마는 "난 네가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라고 말한다. 레이디 버드의 "지금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라고 되묻는다. 미래를 생각하는 엄마와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의 대조. 이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레이디 버드의 엄마는 성실하고 딸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와는 달리, 훌륭한 엄마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딸의 이기적으로 보이는 결정들에 좌절하고 아파한다. 동부로 떠나는 딸을 배웅하지 않겠다며 냉정한 척 하지만, 결국 울먹이며 공항으로 달려가는 모습에서 복잡한 모성애가 느껴진다. 영화의 끝에서 레이디 버드가 다시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장면은 가슴을 울린다. 그녀의 반항기 가득했던 청춘과의 작별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보며, 우리의 지나간 청춘을 돌아보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언급된 것처럼,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은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아이라는 하얀 도화지에 가장 예쁜 색만 입히려 애쓰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 본연의 빛깔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책 <엄마를 위한 멘탈 수업>에서 나는 아이들의 고유한 특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버드대 제롬 케이건 교수는 자녀의 특성과 능력이 자신의 기대와 다를 때, 부모들은 아이들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다양한 사회 집단 속에서 아이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고유한 존재가 되도로 지켜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나 역시 이런 갈등을 겪었다. 공부 잘하던 내 딸이 갑자기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베이스 기타 소리가 너무 좋다면서 베이스 기타를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당황스러웠다. 실용음악학원에 따라갔을 때, 코드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딸의 모습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딸의 고집 앞에서, 나는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했다.

  "엄마, 경쟁률이 77대 1이래요. 면접관들이 금방 재능 있는지 알아본대요. 실기시험이 얼마나 빨리 끝나는지, 타고 왔던 버스가 돌아서 오는 걸 그대로 타고 돌아올 수 있을 정도래요."

  딸의 이 말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순수한 열정이 사랑스럽다. 딸이 나중에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할머니가 되었을 때, 이 경험이 재미있는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우리가 알던 성공의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야 할까?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

<엄마-아이 상호 인터뷰> (엄마를 위한 멘탈 수업 P.236)

  내 책 부록의 <엄마-아이 상호 인터뷰>에는 11개의 질문이 있다. 이 중 단 하나라도 아이에게 물어보자. 아이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작은 노력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레이디 버드의 엄마처럼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말자. 당신의 아이도 언젠가는 날아갈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예쁜 날개를 언제든 흔들어 우리 창가에 앉을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아닐까?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폴 제라티 글 그림, 햇살과나무꾼 역>은 현재 절판되었으며, 2004년 대교출판에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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