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업무상 필요한 파일은 클라우드에 올려두거나 카톡으로 주고받기 때문에 외장하드에 파일을 담아두는 경우가 줄었다. 오랜만에 꺼내본 예전 외장하드에서 내가 교사 초임 시절에 썼던 글을 보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오래전에 쓴 글을 보는 것도 '나'라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방법이었구나, 싶다. 그때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누에 한 마리로 참 많이도 알려주려고 애를 썼군, 새롭다.
나는 어린 시절 누에를 본 적은 없지만, 학급의 유아들을 위해 누에를 키우기로 한 순간부터 이미 누에와 친해져야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누에를 두려워하는 유아들도 누에와 자주 접하고 친숙해지면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도 조금씩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어느 시인의 시에 나오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시구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유아들은 관련된 경험이나 활동을 마치면 누에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거리를 두는 유아도 간혹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뭔가 해결되지 않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이제와 다시 생각을 해보니 나 또한 취향상 좋아하지 않는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하고 시도해도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마치 한데 모아놓고 모두 사랑해야 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득한대도 실제로는 그럴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편견이 자리잡기 전에는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는 스펀지 같은 존재가 아니다. 대상에 대한 개인의 내재된 태도나 취향이 훨씬 더 강력하고 깊게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교육을 통해 상대를 상처 주지 않으며, 내가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넓혀가는 것이 아닐까. 그때, 왜 누에에 대한 활동을 실컷 하고 난 뒤에도 누에를 사랑할 수 없는 아이들을 답답하게 여겼던가, 이제야 미안해진다. 나이가 들었고 내가 '화해할 수 없는' 일이나 사람이 늘어난 지금, 나는 이렇게라도 변명을 찾아본다.
(아래 글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교사 시절 썼던 글이다.)
아침 등원 시간, 유아들이 유치원 교실을 들어서자마자 소리친다. “아직도 먹고 있어!” 누에는 유아들의 야단법석에 잠시 움찔하는 듯하더니 무심하게도 다시 뽕잎을 먹고 있다. 어느새 누에가 담긴 상자 주변으로 유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자는 누에. 아주 귀해서 ‘천잠’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누에와 유아들이 친구가 되는 것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누에를 소개할 때, 유아들은 뭔지 모를 기대감과 꿈틀대는 작은 생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이, 징그러워.’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누에에 대한 거부감은 거미를 만났을 때, 들리는 비명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의 정체는 대부분 부모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달된 것이거나 사실 깊이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 쉽다. 따라서 잘못된 편견은 동물을 사랑해야 한다거나, 잘 보호해야 한다는 말로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부딪치며 알아가는 것만이 편견을 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아들은 뽕잎의 냄새도 맡아보고, 뽕나무 열매 오디 슬러시도 만들어 먹으며 누에에 친숙해지는 활동을 하였다. 뽕잎을 먹는 누에를 조용히 지켜보다 보면 가끔 목소리 조절이 어려운 유아들도 큰 목소리에 누에가 놀랄 수도 있다면서 스스로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한다. 별 똥을 싼 누에를 기특한지 쳐다보기도 하고,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고, 아예 별똥으로 글자를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누에가 먹다 만 뽕잎을 이용하여 디자인 구성을 해보기도 하였다. 어느 순간 유치원 교실에는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가득하였다. 때로 그 소리는 음악처럼 아름답고 규칙적으로 들린다. 뽕잎을 갉아먹으면서도 기가 막히게 굵은 잎맥은 남겨두고 먹는 것이며, 동그랗게 디자인하듯 먹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유아들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똑똑하다. 또 여기는 안 먹고 남겨두었어. 어떻게 알지?”라고 감탄 섞인 질문을 던진다. 한 유아에게 누에를 살짝 만져보라고 하자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손가락을 살짝 대었다가 금세 빙긋이 웃는다. “정말 부드러워.” 다른 아이들도 예상 외라는 듯 “정말? 정말? 나도 한 번 만져보자.” 누에를 만져보고 싶어서 야단이다.
밥 먹기를 싫어하는 여섯 살 유아는 이렇게 먹성 좋은 누에가 마냥 신기한 것 같았다. 급식 시간에 교사가 “아까 누에가 뽕잎 먹는 것 보았지? 하루하루 뽕잎을 열심히 먹으니까 몸도 커지고, 곧 고치를 지을 것 같더라. 너보다 훨씬 몸이 커질 것 같은데, 그때는 누에 언니라고 해야겠다.”라고 우스개 소리라도 하면 유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밥 한술을 뜬다.
누에는 곤충의 변태를 살펴보는 기회 이상으로 더 큰 보답을 한다. 한 장의 잎을 정하면 잎맥만 빼고 차례차례 부지런하게 갉아먹는 성실함이란! 다른 누에가 먹는 뽕잎을 빼앗으려 하지 않고, 혹 나누어 먹게 되더라도 공격하지 않으며, 뽕잎이 없으면 다른 곳을 향해 슬그머니 몸의 방향을 돌리는 유순함과 너그러움에 웃음 짓게 된다.
나 또한 가끔 누에로부터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배우기도 한다. 잠을 자면서도 머리를 하늘 높이 쳐들고 자는 모습은 사실 우리 유아들과 닮아있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먹고 싸고 잠자기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누에는 하루하루 자라 있다. 어제도 오늘도 놀이를 하고, 깔깔대고 웃어대고, 친구와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것 같지만 어제와 오늘의 유아들은 분명 다르다. 유아들은 자는 동안에도 꿈을 꾼다. 그러나 유아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놀이를 해야 다음엔 좀 더 멋진 꿈, 밝은 꿈을 꿀 수 있는 것처럼 누에도 잘 먹고 머리를 높이 들고 자야 누에나방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먹기만 하던 누에가 구석진 곳을 찾아 들어가더니 머리를 높이 들고 하프를 타듯이 실을 토하기 시작했다. 유아들은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듯하여 숨죽여 지켜보았고, 이제 고치 속에 몸을 숨긴 누에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유아들을 만나게 될지 기대하고 있다. 유아들은 아기를 돌보는 엄마처럼 누에에게 뽕잎을 주고, 별똥을 치워주고, 작은 발을 부지런히 옮기는 것을 기특한 듯 바라보았다. 뽕잎을 먹을 때의 먹보 캐릭터에 웃음 짓다가 실을 뽑아내는 대단한 일을 하는 누에를 보면서 유아들은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뽕잎을 구해주겠다던 지인이 뽕잎뿐만 아니라 아예 뽕나무 묘목을 작은 화분에 심어왔다. 이제 뽕나무마저 유치원 앞에 심게 되면 아마 우리 유치원에서는 매년 누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뽕잎과 깻잎을 구별하지 못해서 누에가 깻잎을 먹는다고 말하던 유아들이 누에 엄마가 되다니!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돌볼 수 있는 일곱 살 유아들, 이들이 누에 엄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