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하루를 내일의 걱정거리로 채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저는 일을 좋아해서 바쁘게 살아왔으니 충실한 인생을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면, 제가 이렇게도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자연의 은혜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온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생명의 소중함도, 그것이 나에게 주는 생명력도 줄곧 알지 못했을 겁니다.
책 <1년 뒤 오늘을 마지막 날로 정해두었습니다>_오자와 타케토시 저_ 필름 출판사
인생 마흔 줄이 되고 나니 살면서 제법 많이 들어봄직한 말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식의 표현이다. 책 속의 문장은 죽음을 앞둔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의 고백이다. 그의 이야기가 공감이 되는 것은 평범한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 같아서이다.
얼마 전까지 나의 모습이었고, 한평생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다. 지금도 나의 친구들은 언제까지일지 모를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면 꼭 은퇴 후의 삶은 여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겠노라 미래에 대한 선망을 표현하곤 한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직장인이어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뭐 해 먹고살지'라는 삶의 걱정이 하루의 빈틈을 채워가고 있다 보니 비단 직장 생활이 그런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중요한 건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삶의 풍요가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사는 것을 나만 누리지 못할 때 스며드는 상대적 박탈감은 풍요 속 빈곤을 느끼게 만들고 이내 삶의 나락으로 치닫게 만들기도 한다. 적어도 평균에 수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젊음을 아등바등 살지 않으면 기회조차 얻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나마 근래에는 취업 외에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진 덕에 중소기업 평균 월급 이상 부수입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주거문제를 포함하여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모두 만들었다고 하기엔 빠르게 치솟는 물가상승폭을 따라가기란 여간 쉽지 않다. 그래서 남들보다야 더 빠르게 부를 축적한다 할지라도 하루의 삶을 더 바쁜 일상으로 가득 채워야만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삶은 이렇듯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느리게 살기, 느림의 미학.'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한참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다. 여전히 20대, 30대의 젊은 누군가가 시골마을에 들어가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름의 이슈가 되는 것은 그만큼 아직도 동 세대의 일상적인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1년간 귀촌을 해본 경험이 있지만 그때는 아이가 없었고 지금은 아이가 있기에 다시 선택하겠냐고 물어본다면 망설여진다. 아이의 정서에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이 있다고 하지만 도시가 제공하는 편리와 이로움 또한 매우 크기 때문이다.
매일 걸어 다니는 길에 어떤 나무가 심겨 있는지, 계절에 따라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 또 어떤 가게가 있는지 한 번 떠올려 보면 막상 기억나는 게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워낙 신경 쓸 것도 많고 그 짧은 점심시간을 아껴 커피 한 잔도 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은 괜한 트집일 수도 있다.
사람들 말이 스마트폰 사진첩에 꽃 사진이 많아지면 나이 든 것이라고 한다. 원예 회사에 일했던 나의 사진첩에는 언제나 식물 사진이 한가득이었기에 억울함도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만큼 젊은 날의 우리가 얼마나 주변을 바라볼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지 되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관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길가의 식물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보통 딱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어르신이거나 아가이거나.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스스로에게 종종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나?', '나는 지금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을 하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무엇하나 쉽게 답을 달지 못하겠다.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에 대한 질문처럼 여간 쉽게 명료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주절주절 장황하게 답을 달게 된다.
두 번째 스무 살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여전히도 답을 쉽게 달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깊이 고민해본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떤 날 어떤 책을 읽고 얻어진 인사이트로 빠르게 답을 적어볼 때도 있지만 한 참 지나 또 같은 질문을 받을 때 말문이 막히는 것은 그것이 아직 삶이 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고찰의 시간을 갖지 못했음이지 않을까.
직장생활을 할 때 동료들과 우스갯소리로 주고받았던 말이 있다. 직장인들에게 허리 통증, 목 통증, 위염, 식도염은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라고.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살아야 하는 웰컴 키트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큰 병 하나 정도 얻을 때가 비로소 퇴직할 때라고. 우스갯소리라고 하지만 사실 전혀 우습지 않은 슬픈 우리 자화상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실이 참 그렇게 돌아가고 있음을 보게 될 때 속이 쓰리기도 하다.
이제는 죽지 않을 만큼이지만 쉬어야만 하는 정도의 병을 얻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쉼을 모르고 살아가는 삶에 몸이 스스로 제동이라도 걸어주니 삶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전에 매일의 삶에서 빈틈을 만들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 몇 분이라도 업무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현실의 고민에서 한 발 물러나 삶의 본질에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의 우리에겐 필요하다.
더 이상 빠를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 또는 건강을 잃고 나서야 삶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보다 지금부터 하나 둘 의미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진 것은 오늘뿐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