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여백 만들기
만약에 상반기 동안 나의 생각과, 내가 내뱉은 단어를 빅데이터로 정리해주는 기술이 있다면 나의 넘버원 키워드는 '정리'일 것이다.
결혼하고 어느새 10년 차가 다 되어 간다. 그 사이 이사도 많이 다녔고 나름 버린다고 버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짐이 한가득이다. 직장 생활을 할 때야 이른 아침이면 집을 나서고 저녁에야 귀가하니 구석구석 돌아볼 여력도 없이 하루를 정리하기 바빴다. 그러나 퇴사 후 전업 육아 아빠가 되어보니 어느 날은 숨이 막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내에게 종종 정리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정리 좀 하고 살아!'가 절대 아니다. 같이 정리를 해보자는 취지로 운을 떼지만 아내에게 정리는 언제나 스트레스이고 회피의 대상인 것 같다. 아마 나의 전달 방식이 잘못되었거나 생각보다 자주 이야기해서 그런 것 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이든 집안 곳곳을 정리하려면 아내의 도움이 절실하다. 나는 아무거나 필 받는 데로 전부 내다 버리는 그런 간 큰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미니멀리스트도 그렇다고 맥시멀 리스트도 아니다.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그저 살다 보니 내 몸에 쌓인 지방 덩어리처럼 집안 구석구석 어떤 것들이 들어차 앉아버렸다. 뱃살처럼 짐들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창 이사를 다닐 때면 풀어놓은 그대로 방치돼버린 체 다음 이사 때까지 열어보지 않는 박스도 있다.
그동안은 둘이 살았으니 크게 불편한 건 없었다. 또 말처럼 발 디딜 틈도 없이 짐을 한가득 채워놓고 사는 것도 아니니 어느새 이런 생활이 익숙해져 버린 듯싶다.
생각해보니 물건이 들어차는 거랑 살찌는 것이랑 묘하게 비슷하다. 살이 찌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몇 숟가락 안 먹었는데도 배가 꽉 차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위가 늘어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면 한 숟가락이 더 들어간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인덕이 풍성한 사람이 돼버린다.
집안에 있는 물건들도 마찬가지다. 수납공간이 부족할 때는 하나를 들이는데 신중했지만 공간의 여유가 생기다 보니 어느새 더 많은 것들이 가족이 된듯하다.
지금 사는 집은 연식이 오래된 아파트다 보니 신축 아파트처럼 수납이 잘 되어있지 않다. 아니, 수납공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옷 방과 서재 방바닥 공간까지 갈 곳을 잃어버린 짐들이 무단 점거 중이다. 그 사이 집에 신발이 하나 더 늘었다. 사람은 둘에서 셋이 되었지만 짐은 단순히 플러스 1이 아니다. 새로 산 것들, 물려받은 것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들, 미리 받아 놓은 것들. 종류도 쓸모도 가지가지다. 아내도 나도 대부분 집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작업용 짐들까지 새로 입주하였다.
가끔이지만 방 안쪽에 있는 서랍장에서 공구를 꺼내려면 장난감을 넘고 자잘한 박스들을 넘어 길게 손을 뻗어야 한다. 정신없이 다니다가 발가락을 부딪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점점 짜증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공간의 여백이 사라지니 마음의 여유도 사라진다. 마음이 답답해질 때면 그 화살이 괜스레 아이에게 향하기도 했다. 아직 두 돌도 안된 아이의 칭얼거림과 고집은 당연한 성장 과정인데 정작 그것을 담아낼 여유가 내 안에 없었다. 몇 번이고 아이를 재운 후 혼자 방 안에 앉아 하루를 반성하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또 반복이었다. 정말 이대로는 답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큰맘 먹고 정리를 해보기로 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부피가 큰 아이의 장난감들 중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들은 나눔을 하거나 되팔았다. 그리고 분해해서 박스에 넣어둘 것들을 정리한 후 거실의 소파 위치까지 바꿔줬다. 거실은 사실상 아이의 놀이 공간이면서 동시에 우리 가족의 주 생활공간인 만큼 공간의 효율적인 활용이 필수였다. 거실의 공간을 재배치하면서 아이 책장도 거실로 옮겨 주었더니 책을 읽어주기도 편했고 자연스레 아이가 책을 꺼내 가지고 노는 일도 많아졌다.
그다음은 서재방이었다. 나와 아내가 주로 작업하는 공간이며 나머지 반은 짐들과 책으로 채워진 공간. 작업의 생산성과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장 손댈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었기에 선택한 것은 책상 정리였다.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것과 당장 정리가 시급한 부분에 우선 집중해보았다.
결과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작은 변화이지만 그 작은 여백이 큰 여유를 가져다주는 경험을 하였다. 마치 답답한 도심 속에 있다가 근교에 나간 느낌이랄까. 책상 위에 공간이 생기니 작업 집중도도 높아지고 생산성도 덩달아 올라가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공간은 이제 단순히 작업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감을 높여주는 공간으로 정의가 바뀌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공간을 정리했더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아이를 받아줄 수 있는 여력도 커짐을 느낀다. 문득 TV에서 방영하던 정리 프로그램을 보던 기억이 난다. 출연자들이 왜 그렇게 정리가 된 공간을 보며 눈물을 흘렸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정리의 효용은 단순히 공간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삶 그 자체를 정돈하는 것이고 심리적 안정감과 자신감을 회복시켜주는 행위이다.
특히 전업 육아를 하는 경우에 정리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루가 쉴 틈 없이 흘러갈 때도 많다. 틈이 생기면 하고 싶은 것들도 많기에 정리까지 손대기란 쉽지 않다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온 집안을 다 정리할 생각을 하면 당연히 누구도 감히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온 집안 정리를 한 번에 하는 날은 이사 가는 날 뿐이다.
딱 오늘 1시간 이내로 할 수 있는 범위만 시작해보길 권하고 싶다. 처음의 정리가 오래 걸릴 뿐 한 번 정돈된 상태를 잘 유지하면 그다음부터는 소요시간이 파격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육아맘, 육아 아빠들에게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 등 집을 비운 그 몇 시간은 정말 소중하다. 하루 중 유일하게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물론 그 몇 시간 중에서도 또 일부는 집안 정리나 먹거리 준비 등의 일로 할애되다 보면 정작 나에게 사용하는 시간은 고작 한두 시간이 전부일 수도 있다.
육아로 지치고 삶이 답답하다면 정말 딱 하루만 큰맘 먹고 나만의 공간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정돈된 내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이 위로받고 존중받는 기분이 들것이다. 정리는 지금까지 경험해본 것 중 가장 저비용 고효율의 자기 존중의 경험이었다. 그래서 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
지금 이 글에 공감하고 있다면, 오늘 당장 정리할 계획을 세워보길 바란다.
분명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