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잘 쉬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는 피로 사회를 넘어 초 고강도 피로 사회를 살아가는 듯싶다. 유명 브랜드들의 광고를 보면 제품이나 서비스를 전면에 내세워, "우리 브랜드가 최고예요!"라는 것을 넘어 한 편의 짧은 작품을 보는듯하다. 심지어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TV광고를 보면서 말이다.
최근 나름 파격적인 광고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시몬스의 광고를 보면 그동안의 침대 광고와는 전혀 다른 결을 선보였다. 발 펌프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소리, 공이 굴러가는 장면 등 반복적인 장면과 패턴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고급차 브랜드인 포르셰는 잠적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포르셰만의 감성과 브랜드 경험을 자연스럽게 녹여내었다.
시몬스나 포르셰가 아니어도 안마기기, 공기청정기, 인테리어 가구, 가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건드리고 있는 소비자의 주된 감정은 문득 '휴식', '쉼'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그만큼 '갓생'을 살아간다고 표현하는 요즘 시대에 우리의 피로도는 이미 극에 달한 것이 아닐까.
이제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직장인들에게는 직장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단비 같은 시간. 코로나 시대 이전에는 휴가철에는 무조건 해외로 도주하듯 떠나곤 했다. 직장에서 멀리,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자연 속에서 모든 번뇌를 털어버리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암담했던 코로나 시기 1막이 끝나고 다시 2막이 시작되는듯한 요즘, 아직 하늘길이 열려있는 덕분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듯싶다. 하다못해 제주도라도 다녀와야 휴가다운 휴가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공항은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퇴사 후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는 '성수기'라는 기간에 한정되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성수기. 그나마 휴가를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이면 다행이겠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7월 말 - 8월 초라는, 마치 회사들끼리 담합이라도 한 듯 정해진 기간에 집중된다.
대체 누가 만들어낸 개념인지 '성수기'라는 특정 시기를 지칭하는 단어가 붙으면 가격은 몇 곱절이 돼버린다. 일례로 지난달에 다녀온 1박당 40-50만 원 수준의 키즈 풀빌라가 '성수기'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100만 원이 돼버리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격이 조정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수기라고 비용이 올라가는 것도 아닐 텐데. 이미 비수기에도 늘 예약이 꽉 차는 곳이기에 더더욱 성수기 가격 폭등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아이를 데리고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직장인 부모들만 울며 겨자를 먹어야 하는 건가 싶다.
휴가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광고들을 봐도 그렇다. 육아 템, 이사 템, 신혼 템이라고 광고하는 가정용 안마기기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300만 원이 훨씬 넘는다. 집 한편에 두기도 부담스러운 거대한 크기의 안마 의자는 아마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광고를 보고 있으면 저런 거 하나는 집에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올여름은 혼자면 어떻고 둘이면 어떻고 셋이면 어떠냐며 연일 여행을 떠나고픈 마음을 들쑤시는 광고를 보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사이트에 접속해 여기로 갈까 저기로 갈까 고민해보지만 이내 접고 만다. 코로나 이후 이제 좀 살만해지나 싶었더니 각종 국내외 변수들이 물가상승을 견인하고 있어 예약 및 결제버튼을 누르기가 겁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나는 굳이 이 시기에 여행 갈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도 이전 습관이 몸에 남아있나 보다. 이래서 참 습관이 무서운 거구나 싶기도 하다.
요즘 나는 아내에게 나를 "밑 빠진 독 이선생"이라고 불러달라고 장난스레 이야기하곤 한다. 육아를 하다 보니 쉬어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다. 어제는 일이 있어 1박 2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하루라도 육아로부터 멀어진 시간을 갖는 것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럼에도 피로가 풀리지 않은 건 그 아까운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과욕을 부린 덕분이겠다.
'갓생'과 '안티 워크'라는 키워드가 공존하는 것을 보면 한 편으로 '잘 쉬는 것'이 주목받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일찍이 치열하게 살아 빠른 은퇴를 욕망하는 삶. 경제적 자유, 시간적 자유, 디지털 노마드, 파이어족, N잡러, 등 이미 MZ세대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은 개념들은 그만큼 피로사회에 대한 역설이지 않을까.
결국 잘 쉬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비싼 돈을 지불하던가, 매일 조금씩 풀어내어 과욕에 몰빵 하지 않도록 하던가.
휴가철. 우리는 그저 잘 쉬고 싶을 뿐인데,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리프레시하고 싶을 뿐인데, 편안한 침대에 몸을 뉘어 창 너머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싶을 뿐인데 그 대가는 가혹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이 시간만을 바라보며 지난 6개월을 이 악물고 견뎌온 모든 사람들을 응원해주고 싶다. 동시에 구닥다리 멘트 하나 남기며 오늘의 글을 마쳐본다.
수고한 당신, (걍, 미련 없이)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