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를 알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레 Nov 02. 2022

제한적 신념은 가장 나쁜 습관이다!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옆을 지나오면서 아내랑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여보, 학창 시절, 이 근처에 있었던 떡볶이 집에 자주 가곤 했었는데 그때는 양도 많았고 맛있어서 자주 갔었거든. 그런데 과연 지금 다시 가면 그때처럼 맛있게 먹게 될까? 물론 이미 없어진 지 오래지만."


아내의 답은 왠지 아닐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내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어서 실제로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긴 분식집에 다시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큼 맛이 있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렇듯 삶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참 쉽게 변하는 것 같은데 유독 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내 생각. 여러 가지 생각들 중 유난히 낯선 것에 도전해야 할 때. 그리고 더 나은 삶이 나에게도 이루어 지길 바라는 마음이 생겨날 때면 어김없이 나를 제한하는 생각과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는 현실감각(a.k.a 고정 마인드셋)이 작동한다. 


변화를 꿈꾸며 나름 여러 가지 도전을 해보고 있다. 글쓰기, 독서, 콘텐츠 작업 등 해 볼 수 있는 것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제나 넘어서지 못하는 장벽이 존재한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면 늘 나타나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다. 의심과 자기비판이다. 내면의 검열관은 이내 팔짱을 끼고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너 그거 해보려고?' '해 본 적은 있어?' '경험도 없으면서 하려고?' '준비하는데 또 한참 걸릴 텐데?' '어차피 또 막연한 생각만 있는 거잖아.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있어?'


지겨운 녀석. 또다시 등판한다. 자기 계발서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러한 내면의 부정적인 존재에 대해 이름 또는 페르소나를 만들어 보라고 한다. 가장 우수꽝스럽고 별 것 아닌 무언가로 정의해버리는 것이다. 이미 난 작년에 내면의 존재에게 정성스럽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쭈구리'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저쪽에 쭈그러져 있어!'이고 다른 하나는 '어쭈구리!?'다. 오랜만에 쭈구리를 다시 불러주게 될 줄이야.


제한적 신념은 대부분 무의식의 수면 아래에 있다고 한다. 일상생활 중에는 그저 잠잠하다. 그러나 안전지대 밖으로 발을 내디뎌보기 위해 용기를 낼 때면 어김없이 작동한다. 쭈구리가 작동할 때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시점에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가장 보통의 상태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방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잘못된 신념은 수면 아래에서 치고 올라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리 자신감이 없는 편은 아니다. 대체로 삶을 대하는 태도는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다. 그러나 유난히 멈칫하는 부분이 있다. 최근 계속 풀어내지 못하는 숙제 같은 것인데, 나만의 콘텐츠를 찾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당장 이번 달에도 도망가고 싶어지는 일을 앞두고 있다. 주변에선 잘 믿지 않는 것 같은데 진심이다. 그럼에도 진짜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일단 상황을 회피하게 만드는 '쭈구리'의 등장을 알게 된 이상 남은 건 싸워 이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제한적 신념이 등장할 때면 내면의 혼란을 야기시키는데 대표적인 양상은 사실이 아닌 것, 근거가 없는 것을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정말 콘텐츠를 만든 것이 서툰 사람인가?, 나는 정말 나를 잘 모르나?, 나는 정말 할 줄 아는 게 없나? 와 같은 생각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이러한 생각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무엇이지? 실제로 이런 경험들이 반복적으로 있었나?


사실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거나 실제로는 없을 수도 있다. 무엇에 기인했든 스스로를 한계 짓는 생각이 가득 차는 순간 머릿속이 소음으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차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곧 나의 세계의 한계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이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지금껏 나는 이 표현을 글쓰기의 영역에 국한하여 생각해왔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 있는 존재를 키운 것 또한 나의 언어 사용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연중에 내가 사용하는 부정적인 언어가 쌓여가면 점점 내면의 비평가는 몸집을 키워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결국 나를 제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누구도 아니다. 상황도 아니다. 상황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해석 때문이다. 이제는 나를 개조할 때다. 내 앞에 놓은 장벽은 사실 여러 개가 아니다. 단지 제한적 신념 하나뿐이라는 사실부터 인정해보자. 그다음은 달라질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나에겐 한계가 없음을 믿어주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빙산을 녹일 때다. 수면 아래 얼마만큼의 크기로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를 부정적인 잠재의식을 녹여버릴 때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한계가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은 이제 나의 경험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 몸살이 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