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는 이유
어떤 누군가에게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 나에게는 즐거운 일일 때가 있고, 반대로 나에겐 아무리 죽을 쒀도 개조차 줄 정도도 못 되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껌 같이 쉽게 씹어 달달한 단물을 즐기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 일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 게 삶의 이치라고 생각하면 굳이 남이 가진 것, 특히 재능의 영역에 대해 부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꾸준함도 브랜딩이 된다고 한다면 이미 강력한 브랜딩이 되고도 남았을 거다. 나에게 꾸준함은 살아온 지난 시간을 돌이켜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으니. 중요한 건 꾸준함이라는 냄비에 어떤 재료를 담아 요리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인데, 2021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글쓰기'라는 재료를 열심히 삶아내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재료가 진국이 되고 맛의 풍미를 더해낼 정도가 되려면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듯하다.
사람들은 가끔 왜 쓰는지 묻곤 한다. 브런치 작가로서 나를 만난 사람들은 작가니까 궁금해서 묻는 것일 테고, 오랜 시간 날 알아온 사람들은 '네가? 글을 써? 작가라고?' 하는 심정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요즘 세대에게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나와 같은 세대에게 글쓰기는 소위 등단한 분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졌으니 어색할 만도 하다.
그래서 난 왜 쓰고 있는 걸까? 아니, 왜 계속 쓰고 있는 것일까? 혼자 편안하게 쓰면 되는걸 왜 굳이 괴로움을 자처하며 함께 정해진 기간 동안 매일 글쓰기 챌린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질문을 던지고 내내 머릿속에서부터 마음까지 오고 가기를 반복하며 답을 찾아봤지만, 결국 이르게 된 답은 한 가지였다.
좋아서 한다.
좋으니까 쓴다.
이보다 강력한 동기가 있을까. 이마저도 나에겐 참 신기한 노릇이다. 내가 글쓰기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니. 이제는 머릿속에 꽉 들어찬 말들과 마음속 소란이 느껴질 때 글을 써야 풀린다는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되었다니. 10년, 20년 전의 내가 보면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지만, 내 나이 마흔 줄에 이런 신기한 경험을 다 하고 산다.
그래도 좀 더 살을 보태 이유를 정리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이 글감이 되니 풀어내기 위해 글을 쓴다.
육아로 탕진되는 현생의 삶에 글쓰기는 채움의 시간이 되어 준다.
글이 쌓이니 내가 그려지기 시작했고, 나를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보물 지도가 되어준다.
삶이 글감이 된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쓰기를 시작했을 무렵 소재의 고갈이 언제나 난제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답을 찾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삶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다. 한 껏 멋 부리는 건 어려워도 집 앞에 쓰레기 버리러 나가기 위해 옷 하나 걸치는 건 쉽지 않던가. 같은 마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면 된다.
삶 쓰기가 좋은 건 삶을 더 면밀히 바라보는 시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삶을 다양하게 조명해준다. 그만큼 생각의 힘이 좋아짐을 뜻하고 관점이 다양해짐을 의미한다. 생각의 힘과 다양한 관점은 다시 나의 글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니 이보다 더 좋은 시너지 효과가 있을까.
두 번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탕진하다'의 사전적 정의가 '시간, 힘, 정열 따위를 헛되이 다 써버리다'라는 점에서, '육아'를 그저 '탕진되는 시간'으로 빗대어 표현하기에는 어감상 조금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헛되어 써버려 남는 게 없는 삶'처럼 때론 탈탈 털려버리는 멘털과 체력을 표현하기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요즘 표현에 현생에 치인다는 말이 있다. 현실의 삶이 지나치게 고되니 오죽하면 치여 산다고까지 표현할까 싶었는데 육아 아빠에겐 이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린이집이 숨통을 트여주긴 했지만 점점 힘과 고집이 세지는 아들을 상대하는 짧은 몇 시간 만으로도 '치여 사는 게 이런 건가'하는 마음을 갖게 할 정도니.
그런 나에게 글쓰기는 나만의 심리적 공간이 되어 준다. 꾹꾹 눌러 담아놓은 마음이 터지기 전에 흘려보내는 공간이 있기에 견디는 힘이 생겼고 계속 해내는 힘이 덩달아 길러질 수 있었다. 사실 글쓰기도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지만 운동처럼 오히려 할수록 에너지의 총량을 키워주니 결과적으로 채워지는 양이 더 많아진다는 측면에서 채움의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글쓰기의 선물 중 하나는 바로 나를 만난다는 것에 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작은 우주라는 표현이 참 적절하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무한하지만 동시에 다 깊이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죽을 때까지 나를 다 알 수 있긴 한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글을 써 내려가는 시간이 축적될수록 나를 사고하는 시간도 쌓여가는 것은 맞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바로 내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으니.
글을 왜 쓰는가에 대한 답을 달다 보니 결국 다시 좋아서 한다로 귀결된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이유가 강력한 바탕이 되어 더 좋아지게 만들었다. 어떤 행동을 하든, 무엇을 계획하든 '왜'가 명확하면 꾸준해지기 마련이다. 꾸준함이 반복되면 그것이 곧 루틴이 된다. 글쓰기는 나에게 이미 루틴인 셈이다.
글쓰기는 사람을 사귀는 것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사람도 꾸준히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교감하면서 깊이 빠지게 되고 그러면서 더 찾게 되듯, 글쓰기도 지속하면 할수록 어느 순간 푹 빠져들어 찾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삶이 돼버린다. 즉, 꾸준하면 점점 좋아지게 되고 좋으면 다시 꾸준히 하게 된다는 뜻이다.
12월을 맞이하여 지난 한 해를 돌아보려 한다. 나는 어떤 꾸준함을 가지고 살아왔을까. 기록을 되짚어 보면서 다시 기록을 이어가는 시간은 참으로 설레는 여정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