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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고 볶아야 삶이지.

마흔한 살짜리 개똥철학

by 알레

이 나이쯤 되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나'라는 우주를 이루는 나를 포함한 참 다양한 인간 군상들. 그들의 면면이 조금씩 보이게 된다. 가끔 이런 소리를 종종 하곤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리 싫지 않다고. 반 백 살도 안된, 고작 마흔 조금 더 산 인생이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이런 소리를 해대니 선배들이 그저 웃는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어쨌든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 건 사실인데.


20대 때는 인생 선배들이 서로 지지고 볶는 모습이 그저 불편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인생인데. 우린 왜 이리 힘겹게 서로를 주장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살았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때와는 입장이 조금 변한 부분도 있다.


지지고 볶은 것이 곧 삶이라는 점. 삶은 지지고 볶아야 비로소 맛깔난 삶이 된다는 것. 마치 김치볶음밥처럼.


어쩌면 인간이 서로 지지고 볶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서로 무관한 사이가나, 서로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님 관계의 깊이가 없거나일 것이다. 아, 물론 도인이라도 가능하겠다. 생물학적 구조 자체가 복잡계 수준인 게 인간이다. 지금도 의학적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신비함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란 소리다. 신체적인 부분 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마음의 영역이 더해지면 답이 안 나온다.


그래서 한 사람을 하나의 우주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주만큼 다채로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각각의 인간인데 서로 부딪히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딱 요만큼 살면서 깨우친 건, 존재는 존재를 탐하고, 파괴하고,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유토피아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는 듯싶다. 인간이 재밌는 건, 타인과 또는 다른 어떤 존재와 지지고 볶지 않음, 내가 나의 내면을 들들 볶기도 한다는 것이다. 슬프지만 내가 그런 인간이었다.


근데 결국 모두 살고 싶어 그런 것이지 않을까? 우리 모두 애쓰고 있구나 싶다. 목소리를 내는 것, 글을 쓰는 것, 콘텐츠를 만드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것, 어딘가 사연을 보내는 것 까지도, 어쩜 우린 삶이 그리웠던 것은 아닐까. 혼자 생각해보게 된다.


프라이팬에 김치를 넣고 지지고 볶으면 맛있는 김치 볶음이 되기 마련이다. 과하면 탈 수도 있고 모자라면 맛이 덜 베기도 하지만 결국 지지고 볶는 과정은 필연적이다. 삶도 그렇다. 때론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밍숭 밍숭 애매한 관계로 있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선 성숙될 수 없다.


올 한 해 동안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말 같다. 실제로 대면하는 경우보단 비대면으로의 만남, 오픈 채팅방에서 나누는 채팅으로의 만남들이 대부분이지만, 관계의 정의가 바뀌듯 만남의 정의도 달라지는 법이니 그 안에서도 진솔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감을 경험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늘 서로 볶아대거나 찜 쪄먹는 것이 전부인 것 같은 세상에도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은 사람들, 서로를 배려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 이 또한 인복이라면 인복이라고 할 수 있을 그런 만남들이 참 많았다. 오히려 나의 최선이, 마음씀이 그들에게 온전히 닿지 못했을까 염려될 뿐이다.






뜬금없지만, 삶은 그래서 아름답다. 하나의 예술과 같다. 어우러져야 하모니가 형성되는 음악처럼. 때론 부딪히면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3도 4도의 음처럼 날이 서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름답지 않던가.


부디 올 해가 다 가기 전에 화해와 용서가 있길.

부디 2023년엔 용납과 수용이 있길.

아무리 지지고 볶는 게 삶 이래도 우리네 삶에 사랑과 평안이 이 가득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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