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한 음 한 음 꾹꾹 눌러 내는 그 소리는
그 어떤 소리보다 맑았고, 잔향과 울림이 오래갔다.
- 연주회 소감 중
6세 반 아이들부터, 중학생까지. 저마다 연습의 기간도 각자의 기량도 다르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하는 아이들을 향해 청중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의 박수는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매 연주가 끝날 때면 감동의 박수가 터져 나왔음을 느꼈다.
아이들의 연주회는 처음이었다. 아직 내 아이가 이런 자리에 설만큼 자란 건 아니기에. 조카들의 연주를 보러 간 자리였다. 솔직히 기대보단 그저 조카들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 작은 체구에서, 인사를 할 때의 수줍은 몸부림과는 달리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니 공간은 압도됨을 느꼈다.
아직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여리여리한 손가락으로 누르는 건반은 그 여린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강약을 달리하며 아름다운 선율을 담아내었다. 연주를 마치고 마지막 한 음을 눌렀을 때의 희열은 아마 모두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전문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달리 아이들의 연주는 때론 빨라지기도 하고, 또 때론 살짝 꼬이기도 했다. 그러나 꿋꿋이 끝까지 마치는 모습에서 벅차오름을 경험했다. 연주가 빨라지는 건 그만큼 아이의 마음도 긴장했다는 뜻이겠지만, 그게 또 라이브의 묘미가 아닐까. 연주자의 호흡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그리고 그 호흡을 함께 따라간다는 것.
연주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으니, 오래전 꼬꼬마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시절 누구나 피아노 학원쯤은 다녔던 시절이었다. 형이랑 함께 다녔던 피아노 학원. 아마 내 기억에 나는 따로 그런 연주회에 서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형이 연주하던 모습은 기억이 난다. 곡명과 연주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속에 형은 피아노를 참 잘 쳤기에, 아마 그 연주도 잘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그때의 형을 닮은 아이들이 앞에 나와 자신들의 연주를 뽐내니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언니들, 누나들의 연주를 바라보고 있는 막둥이들의 모습은 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언젠가 막둥이들도 함께 설 수 있는 날이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선생님의 통솔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오가는 모습을 보니 작은 연주회에 임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미 프로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뭇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서 아이들의 기억 속에 이 작은 연주회는 분명 성장의 자양분으로 되새겨질 것이라 믿는다.
입장하고 객석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한 뒤 연주를 시작하고,
연주가 끝나고 내려와 다시 객석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
거기 까지가 연주의 시작과 끝이라고 가르쳤어요.
선생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라고 무대 매너를 간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잘 따랐다. 교육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응당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 마땅히 배어야 할 예의를 경험으로 깨우치게 만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 교육의 본질이지 않을까.
모든 공연이 끝나고, 박수는 끊이지 않는다. 아낄 이유가 없다. 아이들의 도전이, 용기가 너무나 대견스럽고 또 멋지다. 연주회 막바지까지 고민하다 마지막에 용기를 낸 친구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도 이렇게 자신들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용기를 내는데 하물며 어른인 내가 자꾸 주저하고 망설여하면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작은 연주회. 조카들 덕분에 가게 되었던 정말 작은 연주회였지만, 나에겐 그 어떤 연주회보다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 덕분에 늦은 밤,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며 글을 쓰게 된다.
다시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