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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Jan 17. 2023

공항을 바라보며 자란 꿈

어차피 내일을 모른다면 난 더 기대하는 쪽에 걸겠다.

눈앞에 활주로가 보인다. 가지런히 서 있는 비행기들과 높은 망루에서 주위를 살피듯 우뚝 서있는 관제탑. 공항 근처에 있으면 밤 중에도 멈추지 않고 엔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눈을 감고 상상하면 여전히 생생한 그 모습. 1998년 매일 밤, 야간 자율학습을 하며 내다본 창 밖의 풍경은 늘 그랬다. 그리고 난 그것을 바라보며 내가 자라온 세상 밖을 꿈꿨다.


2005년 여름. 처음으로 그 꿈이 이뤄졌다. 형과 함께 떠난 미주지역 여행. 캐나다와 미국을 두루 돌아본 약 두 달간의 여행은 돌아보면 다시 돌아가고픈 순간이다. 4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쪼리를 신고 걸어 다니던 시카고의 거리와, 말로만 듣던 브로드웨이에서 본 뮤지컬 ‘미녀와 야수’, 그리고 휴스턴에서의 부자 상봉과 가라오케에서 아버지와 한 소절 뽑아내던 시간은 너무 생생하다. 마지막 머물렀던 샌디에이고는 지금도 살 수 있다면 가서 살아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아름다웠다.


그때는 나의 꿈이 유난히 잘 성취되는 해였나 보다. 여름에 이어 그 해 겨울에는 처음으로 스페인에 다녀왔다. 4개월간의 어학연수. 돌아보면 너무 짧아 지금도 후회하는 시간이다. 그때 그냥 1년은 머물걸 하며. 스페인은 나에겐 지금도 마음의 고향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머물렀던 Salamanca.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곳의 광장 시계탑이 떠오른다. 매주 목요일 밤이면 밤 12시에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나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광란의 밤을 보냈으니.


시간이 지나 2007년 여름. 여름학기 덕분에 다시 스페인 살라망카에 머물렀다. 이번엔 고작 두 달이었지만 그래도 고향 같은 그곳에 또 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 행복했다.


늘 지구별 어딘가를 꿈꾸며 살아온 덕분일까, 해외 업무를 하시던 아버지를 닮아 나도 해외영업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잔뜩 헤매고 적응하느라 헉헉 거리며 보낸 첫 해가 지나고 드디어 첫 출장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엔 중남미다! 콜롬비아, 칠레의 거래처를 방문하여 연구개발부 부서장님을 모시고 기술적인 설루션을 제공하는 임무를 안고 떠났다.


긴장도 되었지만 완벽함보단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손 발 다 써가며 통역하느라 진땀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 현지 항공사 사정으로 얻어진 보너스 같은 하루. 한 손엔 칠레산 포도를 들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거리를 거닐며 지극히 관광객 모드로 두리번거렸던 추억이 아른거린다.


또 한 번의 중남미 지역 출장은 코스타리카였다. 이번엔 처음과 달리 농장을 둘러보며 생산자들을 만나 작황을 점검하고 새로운 상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나섰다. 아, 다른 때의 출장과 달랐던 건 사장님과 함께였다는 사실. 불편할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편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회시의 사장님이 이 점 하나만은 좋았다. 해외 출장을 함께 가면 배울게 참 많았다는 점.


워낙 배테랑이셨기에, 작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가르쳐주셨다. 그 덕에 지식이 부쩍 늘었다. 숙소도 같이 썼지만 뭐 나야 그런 걸로 불편해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다음 해에는 독일, 네덜란드 출장. 그리고 같은 해에는 네덜란드에서 덴마크, 스웨덴을 경유하는 출장. 그리고 또 그다음 해에는 다시 코스타리카 출장을 끝으로 회사 생활에서 졸업을 했다. 어학연수, 출장뿐만 아니라 신혼여행을 포함하여 아내와 여름휴가 때마다 떠났던 해외여행,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덕분에 온 가족이 함께 떠났던 괌, 태국 여행까지 포함하면 정말 풍성한 경험을 하며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어린 시절 꿈꿨던 삶이 오롯이 이루어졌음을 느낀다. 그 저녁 늦은 시간, 학교 창 너머 보이던 공항의 활주로 위를 수 차례 날아오르고 또 내려오던 비행기를 바라보며 꾸었던 그 꿈. 그 막연했던 꿈은 지난 10여 년 동안의 삶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성취되었다. 이제 나는 또다시 꿈을 꾼다. 다시 활주로를 바라보며. 이번에는 좀 더 주도적인 삶의 성취를 위한 꿈을.


지난날의 나의 삶처럼 다시 날아오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앞으로의 10년을, 아니 그보다 더 먼 미래까지 꿈꿔 본다. 또다시 이루어질 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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