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전하는 마음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오랜 친구 한 명이 문득 떠올랐다. 나의 기억 속의 그 친구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마른 체형을 가졌고 눈이 컸으며 달리기와 미술을 잘했다. 아마 중학생 때 캐나다로 가족이 이민을 가면서 헤어진 뒤로 못 봤으니, 벌써 세월이 아득하다. 아주 가끔이지만 이 친구가 떠오르는 이유는 초등학생시절 가장 친했고, 같은 동네에 살면서 매일 보다시피 했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 한 번은 이 친구랑 주먹다짐을 하며 싸웠던 적이 있었는데, 친구의 얼굴에 난 상처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날 저녁 친구네 집에 가서 울며 사과하고 돌아왔던 어린 시절 여린 마음은 잊히지가 않는다.
만약 그 시절 스마트폰이 있었더라면, SNS가 지금처럼 활발하던 시절이었더라면 여전히 연락이 닿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때론 지나간 인연은 또한 지나간 데로 애틋하고 아련함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그 시간에 남겨져있는 삶의 기억이, 추억이 눈을 감으면 그때로 나를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
그럼에도 가끔은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이제는 나를 기억이나 할까 싶지만, 그 친구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느리더라도 편지 한 통 보내고 싶기도 하다. 잘 있었는지, 그저 그 한 마디라도.
시간은 참 많은 것들을 해결해 준다. 누군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에, 그 시간에 무얼 하며 보냈느냐가 중요하다며 행동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나는 둘 다 맞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처럼 같은 자리에 떨어뜨린 나의 물건을 그 자리에 두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나를 흘려보내니, 어찌 되었든 시간이 지나면 서로 다른 자리에 있게 되니까.
아픔도, 슬픔도, 때론 기쁨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순간은 영원처럼 강렬하지만 인생에서는 그저 하나의 점일 뿐이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하루는 그저 점 하나 찍고 넘어가는 것일 뿐이라 생각하면 느껴지는 감정들이 참 별것 아니게 다가온다. 물론 순간을 깊이 느껴야 함도 중요하지만 삶은 결국 '멈춤'이 아닌 '살아감'이니 순간에 오래 머무르는 것보단 또 다른 점을 찍으며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제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는다. 이 아침, 잠에서 깬 나에게 글을 쓰게 한 내 친구로부터. 그저 잘 살고 있기를,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한 줄로 시작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언젠가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미러'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모든 인간의 기억을 영상으로 시각화해서 돌아볼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한 시대. 기록된 나의 하루를 통해 개개인의 사적인 행적까지 직, 간접적으로 감시당할 수 있는 끔찍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나의 모든 인생이 그곳에 담겨 있어 가끔 돌아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물론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가 남아있으니 쉽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언젠가 기억도 희미해지겠지만 그러다가 어느 날 또 불쑥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겠지 싶다. 그럼 그때 또 글에 안부를 담아 친구에게 전해봐야겠다. 보내지 못 한 편지처럼. 닿지 못할 이야기겠지만.
안녕. 내 친구.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