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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화장실 하나를 내어줬다.

기나긴 겨울, 또 한 번 잘 견뎌주길!

by 알레

'식집사'라고 표현하기엔 내가 더 이상 집사다운 면모는 없어진 듯하여 차마 그렇게 부르지는 못하겠다. 그냥 식물 쟁이가 나에겐 더 어울리려나. 원예 회사에서 근무를 하면서 식물 생활이 시작되었고, 한 때는 약 30가지 이상의 크고 작은 식물이 집의 한편에 자리했던 적도 있었다.


분갈이를 잘하고 싶어서 한 달짜리 클래스를 찾아가 듣기도 했고, 틈이 나는 데로 회사 주변 화분 가게에 가서 이태리 토분과 각종 자재를 쇼핑했던 적도 있었다. 흙을 만지는 게 좋았고, 어설픈 손이지만 내가 만든 새로운 자리에 뿌리를 내려 건강한 연 녹색의 새 잎을 틔우는 모습을 볼 때면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식물 생활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구입 비용이 현저히 낮았기 때문도 있다. 나에겐 업이다 보니 농장에 다닐 일이 비일비재했다. 농장에 가면 언제나 하나 둘 얻어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궁금한 건 꼭 분갈이를 한 뒤 집에서 내가 꼭 길러 보았다.


또 다른 이유는 식물이 가져다주는 포근함이 좋아서였다. 식멍존, 식멍타임이라는 말을 할 만큼 나의 삶에는 늘 초록이들이 함께였다. 거실 한쪽에 매끈한 초록 빛깔과 널찍한 잎을 가진 극락조는 최애 식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곧게 뻗어 올라가 시원시원하게 갈라진 아레카 야자나, 켄챠 야자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기가 한국인가 아니면 동남아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기분이 들뜨곤 했었다.


KakaoTalk_Photo_2022-12-22-16-03-28.jpeg 이미 초록동산으로 갔지만 너무 애정하던 켄챠 야자(Howea Forsteriana, Kentia Palm)



그런데 말입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이야기가 과거형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지금은 오히려 그때만큼 손과 정성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아무래도 그들보다 더 손이 가는 존재가 있으니.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식물들에게는 손이 덜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보통 봄이 되면 분갈이를 해주고 알갱이 비료를 올려주어 한 해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듬어 주는 작업을 하는데, 올 해는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참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흙과 비료에서 나오는 양분을 먹으며 자라야 하는데. 아마 화분에서 식물을 꺼내보면 화분 가득 뿌리가 돌고 있을 것이다. 좁은 집에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소리다.


분갈이도 분갈이지만 올해는 겨울철 대비를 제때 해주지 못했던 게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베란다 온도가 10도 안팎이 될 때까지 계속 두었다가 한파가 올 거라는 예보에 서둘러 화장실로 옮겨 들였다. 일단 물을 주고, 건조해진 잎도 샤워를 시켜주고 며칠 두었는데, 아뿔싸. 한 가지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급격한 온도 변화가 결코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도 그렇듯, 특정 온도에 계속 머물러 있다 보면 자연스레 그곳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식물 역시 점점 내려가는 기온에, 생존할 수 있는 최저 기온까지는 알아서 적응을 한다. 몸을 잔뜩 움츠리게 되지만. 그러던 아이들을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였으니, 급격한 온도 변화는 오히려 극강의 스트레스가 되었고, 이 중에 연약한 아이는 오히려 잎이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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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미안할 뿐.



이제는 화장실에서 잘 견뎌내고 있는 아이들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돌아본다. 내년 봄에는 꼭 분갈이를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따뜻한 햇살이 드는 베란다에 자리할 때까지 부디 잘 살아주길. 좁디좁은 화장실이지만, 그리고 LED 등이 전부이지만, 그 안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잘 견뎌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쩌면 나 역시 가끔은 나 자신을 극적인 환경 변화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때론 탈이 날만큼 무리한 변화를 시도했던 건 아니었는지. 조급한 마음이 마음 가득 차오를 땐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선택들은 결과적으로 지속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어느 순간 탈이 나버렸으니.


홀로서기의 삶은 수시로 드나드는 불안과 마주해야 하는 경우가 많음을 지난 1년 동안 느꼈다. 많은 날을 움츠러들고 속앓이를 하며 지냈지만,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더 성장할 수 있었으니 지난날의 불안은 오히려 성장통이 되어준 셈이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 같은 마음으로 바라게 된다.


잘 견뎌주길. 부지 잘 살아내 주길.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어질러진 방 안 노트북 한 대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전부이지만 함께하는 사람 들과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며 견뎌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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