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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심고 왔습니다.

오늘은 가드너 알레입니다.

by 알레

원예 회사에서 근무하기 시작하고 얼마뒤부터 교회 화단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매년 봄이면 겨우내 텅 비었던 작디작은 화단에 봄을 심는다. 퇴사하기 전에는 회사가 과천에 있으니 남서울화훼단지나 회사 온실 주변에 있는 화원들을 찾아가 저렴한 가격에 식물을 구입했다. 그땐 다들 아는 면이었으니, 늘 도매가로 구입했다. 이제 퇴사자가 되어 다시 맞이한 봄. 과천까지 가기도 멀고, 집 근처 자그마한 화훼 집하장이 있어서 그곳으로 갔다.


알록달록한 초화류들이 길가에 잔뜩 깔려있었다. 맨드라미, 마가렛, 무스카리, 히야신스, 메리골드, 캄파눌라, 로벨리아, 등등. 항상 화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다 사고 싶다. 온 땅을 다 꽃 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순간 치솟아 오른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구경하는 재미도 잠시, 가격표를 보니, 뜨악. 역시나. 그동안 구입했던 가격에 딱 2배 가격이다. 순간 뜨악했지만 어쩌겠나 싶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나름의 혜택을 입었던 것이니 그간 좋은 가격에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그래서 오늘, 가드너 알레가 구입한 식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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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로벨리아, 꽃잔디, 마가렛


오늘은 보라색, 분홍색, 그리고 흰색의 조합으로 구성해 봤다. 개인적으로 메리골드도 좋아하지만, 예전에 심어본 경험에 의하면 한 번 무성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기억이 나서 이번엔 패스! 로벨리아는 보라색이 아무래도 인기가 많지만 흰색도 예쁘다. 함께 심으면 더 예쁜데, 역시 동네의 작은 화훼 집하장에는 인기 있는 것으로만 구비해 놓은 듯하다. 꽃잔디는 언제 봐도 아름다운 분홍빛깔과 놀라운 번식력을 가진 식물이기에 선택. 마지막으로 마가렛은, 너무 보라, 분홍의 채도가 높은 컬러를 받쳐주기 위한 용도로 선택했다.


<알레의 가드닝 명세표>

1. 로벨리아(보라색): 20구 연결구 1판. 구입 총금액: 60,000원
2. 꽃잔디(분홍색): 연질 포트묘 12개들이 4판. 구입 총금액: 40,000원
3. 마가렛(흰색): 연질 포트묘 12개들이 3판. 구입 총금액: 24,000원
4. 식재용 혼합토 30리터 1개: 9,000원

*오늘의 총지출 금액: 133,000원
(본인 인건비 제외. 사실 인건비 없음.)


교회 도착 후 작업을 위한 세팅을 먼저 한 다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오랜만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는 작업인지라 준비 운동도 가볍게 해 주고 작업을 시작했다.


<알레의 가드닝 순서>

1. 식재할 위치에 각각의 식물을 가져다 놓는다.
2. 기존에 있던 흙을 일부 퍼낸다.
3. 새로 구입한 혼합토를 덮어준 뒤 기존 흙도 일부 섞어 손으로 비벼준다.
4. 식재할 위치의 사이즈에 맞춰 식물의 간격을 잡아준다.
5. 쭈그리고 앉는다.
6. 다 심을 때까지 허리를 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는 각오로 작업한다.
(*물론 중간중간 허리를 펴주며 작업자의 컨디션을 좋게 유지해줘야 한다.)
7. 모든 작업이 끝난 뒤 도구를 정리한다.
8. 주변 정리가 끝나면 화단에 물을 준다.
9. 다시 한번 흙탕물을 싹 정리해 주면 화단 작업 끝.
10. 마지막은 인증샷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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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세팅을 마친 후 기존의 흙을 덜어내준다. 그리고 새로 구입한 혼합토를 섞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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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로벨리아, 꽃잔디, 마가렛


IMG_5217.JPG 물 주는 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오랜만에 봄을 심었다. 기분이 좋다. 사실 작업하러 가기 전까지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오늘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조급함이 있었다. 그리고 늘 아내가 함께 했는데 오늘은 완전 혼자만의 작업이니 더욱 마음이 향하지 않았다. 힘들 것을 아니까. 그러나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가드닝을 할 때나, 분갈이를 할 때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은 마지막에 물을 줄 때다. 샤워기로 고르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그 소리를 느낄 때면 하루 작업의 피로가 가신다. 그리고 촉촉해진 꽃잎과 잎사귀들이 싱그럽게 다가온다. 새로운 자리에 잘 뿌리를 내려 무성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물을 충분히 주고 왔다.


봄날의 햇살이 따사로워 작업하는 내내 등이 뜨끈했지만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며 느껴지는 그 뻐근함이 좋았다. 오랜만의 노동이 오히려 머리를 맑게 해 주는 듯싶다. 가벼운 먹거리로 요기를 하고 얼른 글을 쓴다. 오늘의 가드닝 일지를 기록하며 내일 그리고 모레, 점점 자리를 잡아갈 식물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언제나 그렇지만 가드닝은 힘든 작업이다. 고작 몇 개 안 되는 것을 심는대도 거의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식물을 대하는 마음과 흙을 만지는 촉감이 좋다. 그래서 계속하게 된다. 오랜만에 화단에 나비와 벌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지나가던 아이들이 꽃을 보며 기분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내가 봄을 심은 게 아니라 봄이 내 안에 심긴 풍성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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