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은 필기구만을 담는 통이 아이였다
내 방 책상 머리맡 책꽂이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몇 가지 놓여있다. 지금은 듣지 않는 CD 음반들부터, 언제 써봤는지 기억도 안나는 연필깎이, 그리고 필통이 있다. 필통을 열어보면 연필 몇 자루, 색연필 몇 자루, 그리고 샤프심과 지우개가 들어있다. 그중 두 자루의 색연필에는 국민학교 5학년 4반의 내가 그대로 남아있다.
신기하다. 단지 필통을 열어봤을 뿐인데 그것은 시간의 문을 연 셈이었다. 가물가물한 그 시절, 반 친구들과 모둠 활동을 하면서 만들었던 노래와 구호가 떠오른다. ’5학년 4반 청개구리들.‘ 유치하지만 풋풋했다. 연필을 가만히 살펴보니 연필 끝을 깨물었던 자국이 보인다. 왜 그렇게 잘근잘근 씹었던지. 그래도 언제 깎았는지 연필심은 뾰족한 상태로 잘 보관되어 있는 게 재밌기도 하다.
필통은 단지 필기구를 넣어두는 통만이 아니었다. 완제품으로 나온 필통은 그대로 사용했지만 누군가는 두꺼운 종이로 상자를 만들어 자체제작 필통을 사용했다. DIY는 이미 그 시절부터 유행이었다는 사실! 저렴한 비용을 들여 완전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했던 굿즈가 필통이었다. 제작자의 감각에 따라 겉과 속이 꾸며지고 나면 친구들의 주목을 받곤 했는데 소위 지금의 인싸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아쉽지만 난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필통의 겉은 보이는 면이니 나다움을 드러내는 디스플레이와 같았다. 반면 안쪽면은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이었다.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안쪽은 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싶은 자기만의 취향을 표현하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 내 필통의 안쪽을 볼 수 있는 친구는 나와 아주 친한 친구였다는 뜻이다.
기억나는 가장 특이했던 필통은 필통 자체가 미니 축구 게임이 가능하게 제작되어 있던 것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친구 주위에는 쉬는 시간마다 항상 친구들이 몰려있었다.
지금은 가방 안에 아무렇게나 펜을 넣어두고 다닌다. 걸어 다닐 때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잘 넣어둔다. 그러나 그 시절엔 그 달그락 거리는 소리마저 좋았다. 나의 걸음걸이가 필통의 달그락 소리와 만나 그렇게 경쾌해질 수 없었다.
이제는 필통 안에 은밀하게 주고받은 쪽지나 친구들끼리 했던 마니토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있진 않지만 그래도 필통은 여전히 그것을 열 때면 5학년 4반 청개구리들 노래를 부르던 내가 떠오른다.
나에게 필통은 그냥 필기구를 담아두는 통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은 필히 간직하고 싶은 나의 기억을 담아두는 통이다. 그래서 지금도 책상 머리맡 책꽂이에 고스란히 놓여있다. 언제든 그때의 나와 다시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