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끊고 살 수 있을까?
한때 나는 커피 마니아이고 싶었다. 아무 커피나 마시는 사람이 아닌 기분과 취향에 따라 큐레이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커피에 대한 애정이 시작된 건 약 10년 전쯤인 것 같다. 동네에 로스터리 카페가 생기고 난 뒤 사장님과 친해지면서부터 과거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커피의 세계가 시작되었다. 사장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에게 커피는 잠을 깨우는 한 잔의 진한 검은 물이었다. 또는 시럽이 듬뿍 들어가 달달함이나 가득 올린 휘핑크림을 즐기는 디저트와 같았을 뿐이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무슨 커피 한 잔 값이 밥 값이냐고 비아냥대는 사람을 자주 봤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저 쿠폰에 도장 10개 찍는 게 목적이라면 가성비를 따지는 게 지당하다. 당시에 나는 커피도 음식이라 여기며 한 잔에 1만 원이 넘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자고로 신선하고 좋은 원두를 사용할수록 커피의 개성도 도드라지기 마련이니 아까울 리가 있나.
커피 마니아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도장 깨기 하듯 유명한 커피숍을 찾아 발품을 팔지는 않았다. 내가 지향하는 커피 마니아의 모습은 맛집 탐방객이 아닌 커피 문화를 깊게 향유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테라로사나 보헤미안, 카페 리브레처럼 인지도가 높은 로스터리 커피숍도 찾아다녀봤지만 그 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커핑 테스트 원데이 클래스였다.
아, 커핑 테스트란 커피 품종 자체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 그 고유의 맛을 느껴보는 것인데, 보통 카페에선 이런 방식으로 로스팅하지는 않는다. 커피는 기호 식품이라지만 대중화된 맛의 범위가 있다 보니 지나치게 원래 그 품종의 맛을 살리면 오히려 소비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기 쉽다는 게 카페 사장님의 설명이었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경험은 융드립 커피다. 종이 필터로 내리는 핸드드립 커피가 익숙해지니 그다음엔 융드립 커피를 마셨다. 융 필터를 통과한 커피는 종이 필터와 질감부터 맛까지 모든 게 달랐다. 융드립의 맛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더 진하고 강렬했으며 묵직한 바디감이 느껴진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혓바닥에서 느껴지는 바디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미간을 살짝 찌푸릴 만큼의 진한 산미를 느끼고 나면 뒤이어 찾아오는 잔향감이 입안에 오래 남는다. 융드립을 마시고 난 컵에 뜨거운 물 한 잔을 담아 마시면 입안에 남이 있는 잔향을 씻어주는 개운함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어쨌든, 이 정도로 진심이었으니 스스로를 마니아가 되기 위한 노력 정도는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커피 역사는 중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늘 벼락을 맞아가며 시험공부를 하다 보니 밤샘은 기본이었고, 덕분에 일찍 커피의 쓴맛과 인생의 쓴맛을 함께 경험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시간 때우기도 좋고,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기에도 커피숍 만한 곳이 없어서 더 자주 애용했다. 한참 대학원 석사학위과정 중에는 믹스 커피나 스틱으로 된 블랙커피를 종이컵 10잔 정도씩 매일 마셨다. 지금은 ‘물처럼’까지는 아니지만 1년에 적어도 366잔은 마시는 것 같다. 아, 스틱 커피 말고 드립커피를 마신다는 뜻이다.
이제는 매일같이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신다. 커피의 세계에 빠진 지 10년이 넘었으니 집에서 드립 커피정도는 내려 마실 수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 커피를 좋아해서 종종 마시러 오는 친구도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마니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애호가라는 표현이 더 와닿는다. 둘 사이에 굳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니아는 적극적인 행동이 수반되는 사람이고 애호가는 조금은 정적이어도 커피를 마시는 삶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의해 본다. 물론 이는 지극히 주관적 정의일 뿐이다.
커피 애호가로서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어쩐지 하루가 억울하다. 그럴 땐 한 밤중이라도 커피를 내린다. 사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생각한다면 한 밤중에 마시는 커피는 지양하는 게 맞지만 이건 생활 습관의 문제가 아닌 하나의 의식과 같은 것이기에 나는 오늘도 한 잔의 커피를 내린다.
요즘같이 날도 덥고, 생각도 많은 날엔 밤 잠을 잘 이루지 못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래서인지 종종 위경련이 일어난다. 바로 어젯밤도 그랬다. 이런 날은 다음날 커피를 마시지 말아야 하지만 잠에서 깨자마자 커피 생각부터 난다.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나에게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하루의 의식을 깨워주는 리추얼과 같고 순간에 집중하게 되는 몰입의 시간이다. 아무리 바쁘고 삶이 점점 여유가 없어져간다 할지라도 나의 하루에 커피 한 잔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은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이런 나에게 커피를 끊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곧 사망선고를 받는 심정이지 않을까. 그러니 위경련이 와도 커피는 포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