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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삶의 대물림

by 알레

삶은 대물림 된다. 나의 삶이 부모님의 여러 가지 면을 담고 있듯, 내 아이는 나와 내 아내의 면면을 바라보며 기름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 삶의 밑그림을 그려 나간다. 삶의 되물림은 억지로 막아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래서 좋고 나쁨이 없다. 그냥 그게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 형성된 삶일 뿐이다.


자녀의 세계가 커질수록 부모는 작아진다. 우주에서 슈퍼맨이 되었다가 보통의 인간이 되고, 인간 중에 연약하고 귀찮은 존재가 되기도 했다가 다시 깊은 바다가 되고 고요한 산이 되며, 별이 되는 것 같다.


자녀와 부모 모두의 삶이 깊어져 가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세상에서 자신의 민낯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쓴다. 어쩌면 자신의 민낯을 가장 보기 힘든 사람이 바로 자신일지도 모르니.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찰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글쓰기가 필요하다.


글은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들여다볼수록 캄캄한 속을 만나게 된다. 감추고 싶은 수치와 들키고 싶지 않은 서투름을 마주하게 될 땐 지진이라도 난 듯 마음이 요동친다. 나를 내어놓는 글에는 감정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래서 쓰기가 어렵고 마주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럼에도 써 내려가기를 지속하면 어느 순간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글을 쓰면서 만난 나는 무디면서 섬세한 사람이다. 함께 있으니 어색한 표현에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럼에도 금방 이해가 되는 건, 내가 느끼는 나는 무딘 사람이지만 타인에게 느껴지는 나는 줄곧 섬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디고 섬세한 사람이 가능하다.


굳이 '나'라는 존재를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나누어 보자면, 보이는 세상에 접붙여져 살아가는 겉사람은 모나지 않기 위해 무뎌졌고, 겉이 모나지 않게 깎여진 만큼 속은 다각형이 되어버렸다. 가끔 유난히 뾰족한 속사람이 겉사람을 찔러 아플 때도 있었는데, 글을 쓰면서 내면이 많이 다듬어졌다.


오래 글쓰기를 지속하면서 이제 제법 감정의 민낯에 익숙해졌다. 여전히 거르고 걸러낸 일각만을 글에 담아내고 있지만 그래도 마주 보는 것에 어색함은 사라졌다. 오히려 호기심이 생긴다. 내가 나를 안다는 건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것도 있지만, 알고 있던 것을 더 세밀하고 깊게 깨닫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전보다 더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만약 되물려 줄 수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아이에게 읽는 삶과 쓰는 삶만은 꼭 흘려보내고 싶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듯이. 그리고 그것이 아이의 온몸에 스미길 바란다. 지금의 내 삶에 읽고 쓰는 것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답을 찾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질문을 찾는 것이라 믿는다.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좋은 질문을 찾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부디 내 아이는 하루라도 빨리 그것을 깨닫길 바라본다. 물론 이 또한 억지로 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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