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호스트로 진행하는 팟캐스트, <알레스바> 28회 차 녹음이 있는 날이었다. 변함없이 게스트를 초대하여 녹음을 진행하고 있는데 오늘은 게스트 분의 스케줄 상 평소보다는 녹음 시간을 빠듯하게 진행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젯밤, 선곡 리스트를 최종 점검하고 모든 세팅을 마친 후 잠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아침에 아내가, 놀란 목소리로 "여보! 왜 아직도 여깄 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아뿔싸. 큰일이 벌어졌다. 10:20분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집에서 눈을 뜬 시간이 9시 50분이다. 우리 집은 양천항교역 부근. 스튜디오는 역삼역. 시쳇말로 개망, 똥망, 폭망 상황이었다.
마치 무림 고수인 것처럼 침대에서 튕겨져 나와 후다닥 씻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 역까지 단숨에 뛰어가려 했으나 몇 미터쯤 가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뛰었다. 마침 지하철이 역이 도착해 딱 맞춰 탗 수 있었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고 하면 연달아 일이 발생하는가 보다. 9호선 급행열차로 갈아탔는데, 두 정거장 정도를 가는데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한참 서있다 또 가고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섰다. "열차 신호 대기로 잠시 정차하겠습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사람 속을 이렇게 타들어가게 만드는 멘트일 줄 몰랐다. 나중에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오늘 오전에 9호선 라인 일부에서 신호 장애가 있었다고 한다.
그 사이 게스트분과 함께 PD님께 연락을 드려 진심을 담아 사과를 드렸다. 속은 답답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하철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목적지까지의 시간도 지하철 보다 빠른 건 없는 상황이니 지금부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1. 오늘 진행 순서를 변경하기.
보통 2시간 정도 녹음을 할 때 1부를 내가 진행하고 2부에 게스트 음악과 사연을 소개한다. 그런데 오늘은 도착 시간도 11시가 넘을 것 같고, 게스트는 12시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1부와 2부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결론을 내린 뒤 모두에게 연락을 드려 사전 양해를 구했다.
2. 게스트 챙기기.
일정대로라면 내가 게스트를 만나 스튜디오로 함께 올라갔을 텐데 오늘은 도착하려면 게스트가 혼자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패널로 함께 하시는 분께 상황을 설명드리고 정중히 요청드렸다. 1층에 게스트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하시니 미리 챙겨달라고 말씀드렸고 다행히 지연된 시간 동안 잘 챙겨주셔서 낯선 환경에 미리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3. 마인드셋 하기.
나의 실수로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져 주변에 피해를 입히게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지난 행동을 계속 복기하면서 자책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에도 계속 자책하는 말들이 속에서 올라왔다. 나의 행동을 돌아보는 수준을 넘어 내가 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건 솔직히 있을지도 모를 주변의 비난을 약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것이 최소한 양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미 일어난 일이고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게 사실이다. 즉, 아무리 복기하고 자신을 비난해 봐야 내 감정상 태만 안 좋아질 뿐이다. 그럼 오히려 녹음을 더 망칠 수도 있는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어난 건 일어난 거고, 이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했고, 나는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만족스러운 진행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오히려 나은 선택이다. 결론에 이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환승 구간마다 두 다리를 응원하며 열심히 뛰었지만 도착할 때까지 음악을 다시 들어보면서 나눌 이야기들에 더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녹음은 무사히 잘 마쳤다. 오히려 밀도 있는 대화와 속도감 있는 진행으로 더 몰입도가 높은 시간이었다. 게스트 순서 녹음을 먼저 마친 뒤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해드리며 다시 한번 오늘의 일을 사과드렸다. 오히려 게스트 분이 부득이 뒤의 일정이 있어 먼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사과를 하셨다. 다음을 또 한 번 기약하며 배웅을 마친 후 다시 돌아와 나머지 녹음을 마치고 돌아왔다.
오늘의 일로 내가 깨달은 건 상황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다. 사과는 빠를수록 좋다. 설령 그로 인해 녹음이 파투 났을지라도 그것 또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상황을 정리하는 게 나의 역할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비단 이런 일들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는 상대방을 통제할 수 없다. 또한 상대방도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면, 거절을 해야 할 때나 불편한 대화를 나워야 할 때도 조금은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아침나절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만큼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저무는 시간 하루를 돌아보며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니 결과적으로는 꽤 괜찮은 하루였다! 그래도 두 번 실수는 하지 말자. 그리고 운동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