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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과거를 끊어내듯 머리를 싹둑 잘랐다

by 알레

2020년 가을 무렵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펌을 하고 싶어서 길렀는데, 기르다 보니 웬만한 여성들의 기장만큼 길렀다. 숱도 많아 무성하고 풍성했던 머리를 묶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헤어숍에 가는 건 1년의 연례행사가 될 만큼 발길이 멀어졌다. 머리를 기르기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잘라야 했고, 매일 머리를 감아야 했는데 장발이 되고 나서는 묶고 다니면 그만이었기에 머리도 매일 감지 않았다.


거의 4년 가까이 지나면서 기장을 쳐낸 건 두 번 정도였다. 그것도 기존의 길이를 최대한 유지하는 상태에서 손상모를 잘라내기 위해서였는데, 오늘은 2020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파격적으로 머리를 잘랐다. 뭐, 그때보단 길지만, 거의 아이 둘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놓여있는 듯 보일 정도였다.


웃긴 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나에게 머리 자를 생각은 없냐고 물었을 때마다 "전혀요!"라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는데 오랜만에 찾아간 헤어숍에서 원장님이 "이젠 머리를 자를 때가 됐네요"라고 하자마자 "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엔 3초의 망설임이 있긴 했지만.


헤어 스타일에 나름 신경을 쓰는 편이다 보니 괜찮은 숍에 찾아다닌 세월은 벌써 10년가량 되었다. 동네에서 자르다가 강남, 청담 일대에 있는 유명한 숍을 경험하고 난 뒤로는 동네 숍을 갈 수 없었다. 결과의 만족도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환대를 받는 기분과 정성스러운 케어도 한 몫했다. 가끔은 연예인을 보는 재미까지 더해지면서 10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회사를 다닐 땐 대부분 남자 직원들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꽤 민감한 부분 이었기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헤어 스타일은 나를 표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여러 군데를 다녀보다가 지금의 원장님을 만났다. 그땐 숍이 분당에 있었는데, 지금은 수원 광교로 이전했다. 그럼에도 중요한 작업은 꼭 원장님을 찾아간다. 단지 스타일링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서비스가 만족스럽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가격을 지불해야 하지만.


자리에 앉아 커트포를 두르는 순간 숨도 고를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머리를 잘라 버리셨다. 순간 세월이 잘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싹둑 잘려나가 바닥에 늘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니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쓸데없는 미련 따윈 그냥 잘라내라는 듯 그렇게 '서걱서걱' '싹둑' 한 움큼의 머리와 작별을 고했다.


옆에 앉아있던 아내가 꽤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사실 아내는 전부터 머리 좀 자르라고 했다. 흰머리까지 더해 부스스해 보이는 긴 머리로 다닐 때마다 청학동에서 왔냐고 했던 아내였기에, 그저 시원하다는 표정이다. 근데 정말 시원하긴 했다. 한 없는 가벼움이 느껴졌다. '아, 이래서 단발머리를 하기 시작하면 다시 머리를 못 기른다고 하는 거구나'싶을 정도로 꽤 매력적인 느낌이었다.


고작 머리를 자르면서 세월을 운운하는 게 참 웃기기도 하지만 마치 오늘 새 출발의 결의를 다지기 위한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좌절과 절망, 낙심했던 나와 결별을 고하는 느낌이랄까. 원래 의미는 찾는 게 아니라 부여하는 거라지 않던가. 계기야 원장님의 한 마디였지만 의미는 나름 그럴싸하게 부여해 보았다.


그나저나 매일 집에서 머리를 묶고 있거나 집게핀으로 집어 올림머리를 하고 있어서 편했는데, 이젠 묶이지도 잘 집이지도 않는다. 다시 인고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원장님은 8개월 뒤에 보자고 하셨다. 가을쯤 다시 오면 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 헤어스타일은 3개월 에서 4개월 뒤에 가장 예뻐질 스타일이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미래지향적인 머리를 해주신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살짝 어색한 듯 바라보더니 예쁘다고 해줬다. 그래, 그거면 됐다.


오늘부터 정말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 같다. 머리를 잘랐다고 기분도 새삼 새롭다. 이 기분 그대로 2025년은 나다운 삶을 멋지게 살아보는 거다!


오늘의 의식을 거행하기 전 마지막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다시 만날지 모를 오늘을 기억하며, 그동안 붙어있느라 애쓴 나의 머리카락을 기리는 마음으로 작별을 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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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잘려버린 나의 긴 머리여. 이제는 고이 잠드시게.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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