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절대! 결코! 선택하지 않을 출근시간대의 지하철. 한 달 의 한 번씩 녹음이 있는 날엔 어쩔 수 없이 이 시간에 길을 나선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을까 싶어 책을 한 권 들고 나오지만 여지없이 오늘도 꽝이다. 책은 고사하고 9호선 급행열차에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열차에 오르기 전 얼른 가방을 앞으로 둘러메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튼다. 유선 이어폰을 사용하다 보니 혹 주변 사람의 가방이나 옷에 걸릴 수도 있어 줄이 늘어지지 않게 잘 정리해 가방 위에 돌돌 말아 올렸다. 한 손으로는 마치 아기띠를 꼭 둘러 안은 것처럼 가방을 붙잡고 나머지 한 손으론 스마트폰이 떨어지지 않도록 꽉 쥐고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오늘의 음악들을 다시 한번 들으면서 그동안 일찍 잠자리에 든다고 읽지 못한 글쓰기 모임에 참여 중인 작가님들의 글을 읽었다. 출근길 지하철의 국룰은 스마트폰 아니던가. 쇼츠를 보는 사람, 쉴 새 없이 SNS를 스크롤 다운 하는 사람, 뉴스 콘텐츠를 보는 사람 등 보는 건 다양하지만 모습은 참 비슷하다.
내가 내려야 할 역은 고속버스터미널 역이다. 9호선에서 3호선으로 환승, 그리고 한 정거장 뒤인 교대역에서 다시 2호선으로 환승해 최종 목적지인 역삼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역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덕분에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면 물 흐르듯 열차에서 내릴 수 있다. 내려지는 거라고 해야 맞는 걸까?
고속버스터미널 역까지는 가는 사이 몇 군데의 급행역을 지나가는데 그럴 때마다 내리려는 자와 올라타려는 자의 힘겨루기가 일어난다. 내리는 사람들 중에 그나마 문 앞쪽 통로에 있으면 다행이다. 밀리고 밀려 애매한 가운데 자리까지 들어와 있던 사람들은 적잖이 곤욕스럽다. 뚫고 가야만 하는 인간 장벽이 많기 때문이다.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그냥 소리치며 나가야 한다. "죄송해요! 내릴게요!" 예의를 갖춰 표현하지만 몸은 전투적이어야만 한다. 장벽인간들도 일부러 피해 주지 않는 게 아니다. 그들도 피할 여력이 없을 뿐이다. 한 무더기 내리는 흐름을 놓치는 순간 거센 역풍도 뚫어야만 한다. 마침내 옆에 있던 한 여성분의 필살의 몸부림을 보며 문득 이 한 마디가 떠올랐다. "미움받을 용기." 쇄빙선처럼 길을 뚫고 나가는 여성분을 향해 어떤 어르신이 오만상을 찌푸리시며 한참을 바라보는 걸 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3호선이나 2호선은 9호선 급행열차만큼 부대끼진 않는다. 그럼에도 출근시간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많긴 하다. 교대역에서 2호선을 환승하기 위해 2호선 승강장으로 향했다. 시간을 보니 여유가 있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느긋하게 걸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만 뺀 나머지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2호선 승강장에서도 그랬다. 열차가 들어오니 서둘러 최대한 줄이 짧은 곳을 찾아 서는 사람들과 달리 그냥 한 대를 보내버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여차하면 다음 차도 보내버리지 뭐. 급할 것 없잖아?'
넉넉하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표현이던가? 한 때는 나도 지하철 역을 뛰어다녔던 적이 있었다. 어떤 날엔 전력 질주를 한 뒤 환승할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리 바쁘게 다녔나 싶지만 그땐 또 그게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니 이내 그럴만했구나 싶다.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 1층에 도착해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대기가 25번째였다. 오늘은 잔뜩 여유를 부리라는 날인가 보다. 까짓것 기다리지 뭐!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행히 글을 다 쓰기 전에 커피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