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이유로 버텨지는 삶

by 알레

올 3월에 OTT에서 공개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등장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대사가 있다. "살민 살아진다." 이 대사가 비단 해당 드라마에서 처음 소개된 말은 아니다. 보통은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아픔을 받아들이고 또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일컫는 말로 자주 등장한다.


이 표현을 꺼내며 글을 시작하는 건, 그렇다고 내가 상실의 아픔을 겪었다는 건 아니고 최근 겪은 일상에서 문득 이 표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불과 이틀 전 저녁부터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피로누적 때문인지 저녁으로 먹고 잠깐 쪽잠을 잔 뒤로 배탈이 난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아이와 놀아주기로 해놓고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한 아빠의 마음에 미안함이 가득하여 그날 밤 아이의 마음을 달래고자 함께 잠깐의 산책을 했다.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섰던 거라 아이에게도 신신당부를 했다. "아들아, 우리 잠깐만 집 앞에 나갔다 오는 거야. 알았지? 아빠가 '이제 들어갈 시간'하면 들어가는 거다." 아들은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다. 그걸 믿는 내가 순진했다.


역시나 아들은 집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는 모조리 다 사용해 보더니 산책로를 따라 잠깐 걷다가 이내 마주친 놀이터를 향해 여지없이 달려간다. 장소를 잘 못 고른 나 자신을 탓하기엔 이미 늦었다. 아이는 각오한 사람처럼 놀기 시작했다.


하필 그때부터 점점 컨디션은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배 속이 불길했다. 다행히 큰 탈이 난 건 아니어서 견딜 만은 했지만 점점 기운이 없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내가 아이를 챙기는 동안 어디라도 걸쳐 앉아 쉬었다. 날은 덥고 속은 좋지 않다 보니 점점 예민해졌다. 이제 가자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아이는 듣질 않았다.


참다 참다 속이 좋지 않아 결국 아내와 아이를 두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랑 아내도 돌아왔다.


하루가 지났다. 밤새 살짝 열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았고 머리가 아팠다. 결국 아내에게 아이 등원을 부탁하고 나는 더 잤다. 눈을 떠보니 이미 오후였다. 하루가 훅 가버리는 줄도 모르고 잠을 잤다. 일어나 아내가 사 온 죽을 먹고 해야 할 일을 좀 했다.


정신이 좀 드는 듯했지만 여전히 기운은 없었다. 날이 좋아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바닥 분수가 나오는 놀이터에 가자고 했다. 마음은 무척 가고 싶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냥 쉬고 싶었는데, 아이가 좋아할 걸 알기에 마냥 쉬는 것도 편치 않았다. 어차피 집에만 있는다고 좋아지지 않으니 움직여 보기로 했다.


아이랑 한참 놀고 들어와 씻기고 저녁을 먹었다. 또다시 잠이 쏟아졌다. 도저히 이겨낼 재간이 없는 졸음이었다. 잠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정신을 차리니 시간이 좀 지나있었다. 그제야 몸이 좀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재우고 난 뒤 밀린 하루를 정리했다.




"삶은 어찌 되었든 살아진다."


놀이터에서 한참 재밌게 놀던 아이에게 "아빠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이제 그만 돌아갈까?"라고 여러 번 부탁해 봤지만 아이는 듣는 듯하다가도 이내 "아직 더 놀아야 돼"하면서 제 갈 길을 갔다. 5살 배기 아이에게 이해를 바란 건 과욕이었겠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기에 내심 서운함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그러면서도 또 한 편으론 신나게 노는 녀석을 바라보는 게 그저 좋기만 하던걸.


그래도 버틸만했으니 버틴 거다 싶지만, 그보단 아빠라서 견디게 되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이 또한 부모가 되지 않았으면 겪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살면 살아진다는 말은 어쩌면 여러 상황에서도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주문처럼 다가왔다. 저마다 처한 상황과 느껴지는 강도는 다르겠지만 가끔은 이 문장을 되뇌어 보는 것도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일 것 같다. 무조건 견디다 보면 새로운 날이 다가올 거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삶의 한 편에는 이 마음을 깔고 가는 것도 지난한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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