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나를 이야기하다

- [Vol.9] 목요일 라이프 매거진

by 알레

페르소나. 살면서 거의 들어볼 일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 단어를 최근 몇 년 사이 무수히 많이 듣게 되는 건 그만큼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 이 단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전혀 새로운 단어도 아닌 이 단어가 왜 그리 어렵게 다가오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것일까.


온라인 생태계에서 자신을 브랜딩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만의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어봤을 것이다. 나에게 페르소나는 마치 최근 몇 년 사이 TV 예능 프로에서도 유행하듯 부캐를 만들어야 한다는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실체인 나는 그렇지 않은데 온라인 상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나를 창조하여 세계관을 구축하고 히스토리를 부여해주면서 마치 이미 존재해왔던 생명체인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이해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항상 느껴왔던 괴리감이었고 그것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이었음을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목요진의 아홉 번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한 발짝 나아간 나의 페르소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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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페르소나가 뭔데?

Editor Ale's Note


페르소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나에게 혼란을 만들었던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분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쓰는 가면을 뜻하는 단어다. 극 중의 배우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아닌 극 중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만큼 그 순간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온라인 세계는 연극 무대가 아니며 그곳에 있는 나도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면을 쓴다는 생각, 부캐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그만큼 혼란스럽기 쉽고 또한 지속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페르소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페르소나=내가 골라서 입는 옷

페르소나는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페르소나는 오늘 내가 고르는 옷, 그리고 그 옷을 입은 나입니다.

앤디슨저_<0에서 시작하는 인스타 독학노트>에서 인용



최근 페르소나에 대한 사고의 방향을 전환시켜준 글이 있었다. 저자의 표현처럼 '페르소나는 곧 내가 골라서 입는 옷'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괴리감이 사라지게 되고 그려보는 것도 쉬워졌다.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정장을 입은 나, 후드티를 입은 나. 입는 옷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내가 나인 것은 변함이 없어요. 정장을 입고 점잖아지든, 후드티를 입고 자유로워지든 나는 나 그대로인 것이죠. 이처럼 페르소나를 설정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옷을 입을지?>, <이렇게 입은 옷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보여줄까?>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앤디슨저_<0에서 시작하는 인스타 독학노트>에서 인용



위의 예시에서 처럼 '어떤 옷을 입을지, 이렇게 입은 옷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보여줄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페르소나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할 때, 입는 옷은 다양할지라도 다양한 옷을 입는 존재가 '나'라는 사실은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온라인 상의 페르소나는 나와 전혀 다른 한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페르소나 또한 퍼스널 브랜딩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으로서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전히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선명하지 않게 다가왔다면, 그래서 손에 잡히지 않는 고민거리로 남겨져 있었다면 생각의 출발을 재설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내 안에는 이미 여러 페르소나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페르소나: 뉴포티


페르소나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나니 나의 옷장에는 참 다양한 옷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고 있는 나,
사진을 찍고 있는 나,
육아를 하고 있는 나,
식물을 좋아하는 나,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
40대에 성장통을 겪고 있는 나,
외향적인 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기는 나.


정말 다양한 존재들이 있었다. 각각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두세 가지를 묶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식물 사진을 찍고 짧은 포토 에세이를 쓰는 나,
글을 통해 40대의 성장통을 30대, 20대에게 이야기하는 나,
육아를 하고 있지만 홀로 있는 시간을 만들어 자기 계발 중인 나.


여전히 나의 페르소나에 대해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리고 이런 컨셉들을 관통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뉴포티(NEW FORTY)'다.


내가 정의하는 '뉴포티'는 자신의 삶에 진취적이고, 변화에 대한 망설임 또는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하며, 성장을 위해 리스크도 감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흔이 되었을 때 가장 많이 생각해보았던 것이 지난 20년을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후회와 미련이 남아있었다.


40대를 소위 '두 번째 스무 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흔 살에 접어들면서 인생의 물꼬가 한 번 틀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느낌을 강하게 느꼈다. 서른아홉에서 마흔이 될 무렵 가장 강력하게 들었던 마음은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냥 현실의 푸념이 아닌 인생에 한 번쯤은 늘 가던 길에서 빗겨 가보고 싶다는 강력한 열망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직장생활을 멈춰 서게 한 가장 큰 동기가 되었고, 계속 글을 쓰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퍼스널 브랜딩을 통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40대에게, 그리고 다가올 40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모르겠는 30대에게, 그리고 또 미리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은 20대에게 나의 이야기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페르소나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나의 욕망과 바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기록해 나가다 보면 점점 그 윤곽이 선명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조만간 내가 입고 싶은 옷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며...


목요진의 지난호에서는 풍랑의 끝에서 다시 나침반을 들어 올리며 새 출발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호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방향을 찾아가는 시간들을 기록해보았다. 페르소나를 설정한다는 것이 결코 전혀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나니 내가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재밌어지기까지 한다.


지금까지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고뇌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한 장 두 장 실제로 밑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을 반복해보면서 나만의 페르소나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기록해볼 계획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이어져 '나'라는 한 사람의 인생의 선을 분명하게, 그리고 더 나아가 진하게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