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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Dec 22. 2018

생각의 역습으로 역공하기

생각의 역습/키스호르 스리다르

“니가 마지막으로 보낸 인보이스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사무실을 막 나서려는데 마이클이 불러세운다.

찰라의 순간이었지만 무슨 얘기를 꺼낼 지 감이 왔다. 몇주 전에 발송한 출장비 인보이스였다.


“시간당 페이가 아니라 프로젝트 계약을 하고 가격을 책정했으면 모든게 합산되어 있는거 아냐?”


출장시 교통, 숙박 등의 경비와는 별도로 일당 책정해 포함시킨 'out-of-office' 항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었다. 최근 세번의 출장이 누적된 만큼 금액이 꽤 되었고, 보통 잔금에 합산하는 부분을 따로 청구하니 새삼 주목을 받으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마이클의 논리는 탓할 데가 없었다. 공동 디자이너인 덴마크 스튜디오는 시간당 페이인 반면 나는 프로젝트 계약을 하면서 디자인 가격을 책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서 조항에 디자이너가 출장시 별도로 청구하는 out-of-office 비용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 어렵게 만들어 보낸 계약서 초안에 함흥처사이더니 두달이나 지나 허둥지둥 계약을 하려던 조선소 사장 요하네스는, 싸인 직전에야 이를 발견하고 항의했지만 결국엔 수긍하고 싸인을 했다.

문제는 이 조선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최종결정자이자 견제세력 없는 절대파워는 이 세계의 주인인 마이클이라는 것이다. 월급사장 따위...


여기에서 마이클의 논리에 반박하기 시작하면 패할 게 뻔했다. 나는 사안을 다른 각도에서 잡았다.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우리가 결정한 이후 많은 게 변했지. 그때마다 주어진 상황에서 유연한 태도로 오로지 프로젝트의 최선을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아무리 모든게 뒤죽박죽이라도 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기본적인 약속들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해. 계약서에 싸인을 했으므로 이건 충족됐다고 믿었어."


70ft 요트의 익스테리어 제2 디자이너로 프로젝트에 합류했는데 갑자기 뜽금없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게 되고, 그것도 공동 디자이너로 투입돼 파트너를 세번 바꾸며 일년여간 우주대혼란 이벤트들을 겪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마이클은 자기는 계약서를 읽지도 않았었다, 이 프로젝트는 디자이너를 너무 많이 바꿔 비용이 초과됐다, 이걸 반으로 할인해달라 등등 나를 흔들기도 했지만


"이미 일년 전에 요하네스와 논의 끝에 합의한 내용을 프로젝트가 끝나가는 지금 다시 꺼내 얘기해야 한다면 우리가 다음에 같이 일하게 될 경우 당신의 신용 비용이 올라가는 게 문제일 것 같..."


'신용 비용'라는 표현이 나오자마자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알았어, 오케" 하더니 인보이스에 사인을 해버렸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맞이한 상황이라 긴장하고 말은 많이 떨렸지만 성공한 '프레임 전쟁'이었다.

'디자인 총액에 출장비도 포함되는거다'는 마이클의 맞는 말을

'이미 싸인한 계약 조항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나의 맞는 말로 대응함으로써

'출장비를 제하기 위해 이미 싸인한 계약을 번복하는 잘못된' 행동을 막아낸 것이었다.

워낙 이런 게임에 젬병이던 내가 천하의 마이클을 이기다니! 그동안 읽은 책들의 공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특히나 '프레임'이라는 심리적 기제를 발견 한 건 꽤 오래전인데 최인철 교수의 동명의 책에서 처음 접했다. 이런 돌발상황에서 생각이 나다니 이제 어느정도 체화된 것인가 번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다.


근래에 읽은 책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은 단연 키스호르 스리다르가 쓴 '생각의 역습'이다.

저자는 인간은 이성보다 본능적인 태도에 의해 지배받게 마련이고 인간의 동기란

자아 + 안락 + 욕망 + 불안

이 네 가지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고 말한다. 반추할 수록 맞는 말이다. 마이클의 경우 '자아'가 중요한 사람이라 본인이 계약서를 뒤집는 옳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평판에 민감했을 것이다.


이 넷 중에 가장 신선한 것은 '안락'에의 욕망이었다.

우리도 모르는 새에 심리적 안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잘못된 선택들을 꽤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책을 읽고야 깨달았다. 저자는 불만을 제기할 때에는 상대에게 해결책도 함께 제시하라고 조언한다. 이미 압박을 받고 있는 상대는 제안받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메일을 쓰는 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굉장한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핵심은 이 역시 상대방의 '안락에의 욕망'을 공략하는 것이다. 즉, 내가 원하는 솔루션을 '떠먹여 주면' 대체로 그대로 행동한다는 것.

이메일에서 첫 번째 쪽지기능을 하는 것은 제목줄이다. 제목이 구체적이고 개인적일수록 그에 적합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제목과 관련해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는 대부분 수신자가 아니라 작성자의 시각에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내용 관련 제목 대신 행동 관련 제목을 중시한다. 이것은 쪽지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수신자에게 생각할 수고를 덜어준다. 제목이 단순히 내용만 알려준다면 수신자는 무엇을 해야 할지,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모든 사고의 과정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장애물이며 이 장애물 때문에 실제로 행동을 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인포그래픽의 효용도 결국은 '안락'에 호소하는 원리인듯 하다. 프레젠테이션 마지막에 넣는 이미지 역시 논리적인 수치로 결과의 성공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귀찮은 일인데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뇌가 투영할 이미지를 눈앞에 보여주는 '떠먹여주기'의 일환이다.

슬라이드를 사용하더라도 수치를 줄이고 분명한 그림으로 설명하라. 가령 고객만족도를 보여줄 때는 그래프가 아니라 기뻐하거나 불만스러워 하는 고객의 사진을 보여준다.


회의를 할 때에도 끝날 즈음이 되면 다들 피곤한 상태가 되어 안락을 추구한다. 핵심은 당사자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마지막 안건들을 쉽게 통과시키는 것이 본인의 피로 때문이 아니라 안건 자체가 괜찮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안락에의 추구는 무의식 중에 이루어지므로.

개인적으로 당신이 마음을 두고 있는 뭔가가 극심한 논란을 부를 것 같으면 끝에 가서 안건으로 채택하라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대부분 이미 지쳐 있고 반발심은 누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이 효과를 의도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 힘을 아껴두어라. 또 조심할 것은 누군가 회의 끝 무렵에 다시 짤막하게 주제를 입에 올리면 작전상의 의도일 수 있으므로 특히 주의해야 한다.


'마음의 씨앗' 부분도 전적으로 공감했다.

이는 내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개념인데 나 역시 이를 '씨앗'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심리 기제가 존재하는 것이구나 신기했다.

누군가 당신을 강하게 설득하며 반대되는 주장을 제기할 때는 대치국면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이럴 때 의혹의 씨를 뿌려주면 상대의 잠재의식은 은연중에 당신의 우군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지식의 부족이 이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일단 씨를 뿌린 다음에는 의혹이 자라도록 돌봐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상대의 주장은 오래지 않아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의혹은 잡초와 같다. 일단 씨가 뿌려지면 저절로 자라며 이내 주변의 풀을 뒤덮는다. 의혹은 의도적으로 짤막한 질문으로 유발하는 것이 가장 좋다.
"뮐러 씨가 이 문제의 적임자라는 것은 분명해. 하지만 그에게 그럴 만한 시간이 있는지 어떻게 알지? 내가 듣기로는 요즘 가족문제로 정신이 없다던데."

꼭 의혹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뿌려진 호기심은 적절한 토양이 갖춰져 있다면 무섭게 자라는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키운 이 생각의 나무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심은것 보다 견고한 것 같다.


이 책은 각각의 상황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적 기제를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예를 제시해서 특히나 더 재미있다.

혹시 당신이 새로 붙박이장을 들여놓고 싶은데 같이 사는 파트너가 비용을 걱정한다면 당신이 직접 고르지 말고 파트너에게 인터넷이나 가구점에서 찾아보도록 부탁하라. 그럼 쉽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파트너가 들인 노력은 이미 매몰비용이 되기 때문에 결국 붙박이장을 구입할 가능성은 대폭 커질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이 정도로 용의주도한 사람이랑 지내려면 정말 숨막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에필로그.


위의 대화가 있은지 한달쯤 지나 마이클의 비서로부터 메일을 한통 받았다.


"알레씨아, 마이클로부터 이 인보이스 반으로 할인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결제가 안 되고 있어서 설마 했는데 실화였다. 순간 욱 하는 마음을 누르고 답 메일을 '설계'했다.


"그렇잖아도 지난 방문때 마이클이랑 정확히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끝냈어. 내 눈앞에서 인보이스에 싸인도 했는걸. 미안하지만 이 마이클의 요청이란 게 그 합의 전에 받은 내용인지 이후인지 확인 좀 해줄 수 있을까? 만약 후자라면 그 out-of-office 비용을 할인이 아니라 아예 뺀 인보이스를 월요일 보낼께."


그리고 답메일 참조에 마이클을 추가했다. 본인이 합의한 내용을 대놓고 뒤집기 민망하니까 비서에게 시키는 게 더이상 비열할 수 없다. 의중은 눈에 빤히 보였지만 마이클이 신용있는 자아를 지킬 기회를 한 번 더 주면서 바람직한 결과에 다가가기 위한 설계였다. 제3자인 비서가 공식적으로 이 문제에 합류해 관찰자가 된 마당에 '합의를 끝내고' '인보이스에 싸인도 한' 건에 대한 본인 말을 뒤집어 버린다면 자아가 상당히 많이 손상될 것이다. 할인이 아니라 아예 제외를 하겠다는 내 의향은 내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항의 표시였다. 세계 몇대 조선소의 창립자이자 손꼽히는 거부 마이클은 과연 돈 몇천 유로에 본인 말의 신용을 져버릴 것인가?

결과는 그랬다.


"니가 하는 말 다 맞는데 여전히 왜 이 비용이 따로 책정돼야 하는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프로젝트 계약을 했고 너 어시스트 하라고 다른 디자인 스튜디오도 고용하느라 추가 비용이 들었는데 (후략)"


...심지어 이젠 공동 디자이너 덴마크 스튜디오가 내 어시스턴트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심리학이나 협상에 관한 책들을 읽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심리 기제가 통하지 않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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