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요트잡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ASYSAILING Apr 08. 2023

세일링 요트는 어딜 가나 마이너

작년 1월 2일에 시작해 일 년간 매주 일요일, 이탈리아 세일러 장카를로 페도테가 쓴 책을 번역해 뉴스레터로 발송했습니다. 나도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겸, 가볍게 시작한 프로젝트였으나 막상 해 보니 번역이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매주 일요일이 가까워 올수록 번역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이다가 도저히 이번주 번역은 못 끝내겠다 싶은 순간 느닷없이 항해 일기를 쓰기 시작해 연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가을, 잦은 배 고장으로 항해 중단을 결정한 뒤, 배를 올려놓고 계획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중 이 항해 일기를 책으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일링 인구가 많고 항해기를 찾는 독자층도 두터운 영어로요. 


그동안의 번역 스트레스를 떠올리면 다시 시도할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겠지만, 그 사이에 ChatGPT라는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가 출시됐습니다. 왕성한 트위터 활동 덕에 비교적 초반에 이 신박한 인공지능에 대해 알게 돼, 재미있게 가지고 놀다가 "얘한테 내 항해 일기 번역을 한번 시켜볼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죠. 


저만의 독특한 어투가 있고 (남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반어를 즐겨 쓰는 제 글 스타일을 ChatGPT가 어느 정도 구현을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몇 단락을 번역해 봤는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같이, 하루에 몇 시간씩 ChatGPT와 지난(중단된) 항해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글이 내가 의도한 느낌과 다르면 몇 번이고 다시 번역하게 하거나 추궁(?)을 하기도 하고, 한 문장에 변형을 가해 몇 가지 버전(variation)을 만들라고 요구한 뒤, 그중에서 딱 마음에 드는 표현을 고르기도 했습니다. 


책 한 권 번역을 함께 마친 후 떠오른 생각은, 마치 원어민 인턴과 함께 작업한 것 같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녀석이기에 내 능력의 범위 밖 표현들도 쓸 줄 알지만,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할 때도 있기에 감독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내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과 말을 다듬는 과정이 필요한 것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집요하게 추궁해도 자존심 상해한다거나 회사 그만두는(?) 문제없이, 성실하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점이 좋더군요. 다만 과도한 요청으로 인한 서버 과부하 문제로, 이 똘똘한 인턴이 한 시간 동안 질문을 거부하는 저의 문제가 남을 뿐... (유료 서비스 출시 후 이 대기 문제는 ChatGPT 4 버전에서만 일어납니다)


ChatGPT의 인기에 더불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Midjourney일 것입니다. Midjourney는 AI 기술을 활용한 이미지 생성 서비스로, 사용자가 복잡한 그래픽 작업 없이도 쉽게 다양한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게 합니다. 트위터 친구들이 간증하는 테스트 이미지들은 상상 이상이더군요. 이미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가는 이미지들은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활용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사실 프레젠테이션 만들 때 원하는 이미지 검색하는 것만큼 시간 많이 걸리고 지루한 일이 없죠. 사람들이 환호할만합니다.


만약 인공지능이 '삽화'까지 그려준다면 이제 아이디어나 경험만 있으면 책 내는 과정이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요? Midjourney는 사용자수 폭증으로, 무료 이미지 생성을 중단한 상태. 비슷한 Shutterstock에 회원가입을 하고 테스트를 해 봅니다. 그런데 프롬프트에 세일링 요트를 넣는 족족 대항해시대의 범선들이 나오더군요. 좀 구체적으로 프롬프트를 넣어야겠구나, 깨닫고 아래와 같이 넣습니다.


조타수가 바람 방향으로 타를 꺾은 베네토 40.7, 히스 로빈슨 스타일의 일러스트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묘사.
Beneteau 40.7 with a helmsman steering into the wind, depicted from an overhead view in a Heath Robinson-style illustration.


히스 로빈슨은 20세기 초 영국의 만화가인데 아래와 같은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다시 대항해 시대 범선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베네토 40.7이라는 모던한 세일링 요트 모델명도 주었고, 

구체적인 그림 스타일도 주었고, 

배에서 조타하는 사람도 하나 있겠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아아.. 멋진 일러스트레이션이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다 항해 중에 찍은 사진 대신 일러스트레이션을 삽화로 넣게 되는 건가요?


결과는

그러나


둥...


둥..


둥..

...

..

.


이 배는 왜 메인세일이 앞에 달린 것이며
이 배는 왜 스핀내커를 펴고 후진하고 있으며
이 조타수는 왜 해치에서 튀어나와 병을 깨고 있으며(그 앞의 노란 부이는 과연 무엇이며)
이 조타수는 왜 마스트에 관통당해 사망한 것인가

결과물이 이런 이유는 인공지능이 학습할 세일링 요트 이미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일링은 나름 요트 문화가 발달했다는 나라에 가도 마이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인공지능이라고 예외가 있을 리가 없죠.

매거진의 이전글 어리버리 북미 항해일기 연재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