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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중 Jan 09. 2019

범사가 주는 감동을 보살피는 일

시집 들여다보기, 이병률 시인의 <내가 쓴 것>



눈을 뜨고 잠을 잘 수는 없어

창문을 열어 두고 잠을 잤더니

어느새 나무 이파리 한 장이 들어와 내 옆에서 잠을 잔다


그날 아침

카페에 앉아 내가 쓴 시들을 펴놓고 보다가

잠시 밖엘 나갔다 왔는데

닫지 않은 문 사이로 바람이 몹시 들이쳤나 보다


들어와서 내가 본 풍경은

카페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람에 흩어진 종이들을 주워

내 테이블 위에다 한 장 두 장 올려다 놓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우리들은 금세 붉어지는 눈을

그것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

그럼에도 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니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


- 내가 쓴 것,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中 -


  '시인의 절제란, 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바를 가장 잘 건사하기 위해서 시인이 반드시 취해야 할 도리라는 것을 이병률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김소연 시인의 발문이 잘 이해되는 시였다. 


  자신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의 호의를 생경하게 바라보며 시인은 가슴 따듯한 감동과 위로를 받았으리라.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글 몇 구절이 시가 되는 것이 아닌, 우리네 삶의 한 장면이,  한 순간이 시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을 경험했으리라.


  그럴 때가 있다. 시인의 경험처럼, 잘 정돈된 시가, 노래가 주는 감동과 위로보다 범사에서 느끼는 감정이 더 와닿을 때가 있다. 조촐하게 차려 놓은 술상에서 오랜 친구와 주고 받는 술 한잔이, 지하철을 타고가다 옆에 선 여인의 등어리 위에서 나를 보며 미소짓는 아이의 표정이, 추운 겨울 얼어버린 몸을 녹이는 따듯한 포장마차 어묵국물이 주는 감동이 크게 와 닿을 때가 있다.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는 시구와 '경험한 바를 가장 잘 건사하는 태도가 시인의 절제'라고 말하는 김소연 시인의 발문처럼 우리도 범사에서 느끼는 감정을 잘 건사한다면 누구나 시인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시를 쓰지 않아도,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핵심은 우리네가 느끼는 그 감정을 잘 보살피고 돌보는 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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