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급지 순경이 '보고서에 적지 못한 ‘ 보이지 않는 노동들
"오늘도 평온한 평창군입니다."
교대 근무를 시작하며 팀장님들이 전하는 이 말은 때로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진다.
사건 사고가 빗발치는 대도시의 경찰들에게 '평온'은 휴식의 신호겠지만, 이곳 3 급지 경찰서의 순경에게 평온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들기 위한 치열한 움직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신고 전화가 울리지 않는 오후, 나는 순찰차의 핸들을 잡고 익숙한 골목으로 스며든다. 사람들은 경찰이 신고가 없으면 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의 진짜 일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가족은 잊어도, 제복 입은 순경은 기억하는 마음
나의 순찰 업무 중 가장 마음이 쓰이는 곳은 마을 끝자락, 치매를 앓고 계신 어르신의 집이다. 그곳에 가면 매번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
어르신은 곁에서 수발을 드는 사회복지사는 물론, 가끔 들르는 친구들조차 "누구신데 우리 집에 와 있느냐"며 낯설어하신다.
모든 기억이 파도에 씻겨 내려간 모래성처럼 허물어진 상태.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문 앞에 세워진 나의 순찰차와 제복 입은 내 모습만큼은 어르신의 기억 속에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이구, 우리 김 순경 왔어?"
대문을 열기도 전에 어르신은 주름진 손을 뻗어 내 손을 덥석 잡으신다. 오랜 친구도 잊어버린 어르신이 나의 이름과 직업을 기억해 주시는 그 순간,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책임감과 뭉클함을 느낀다. 어르신은 내 손을 꼭 잡고 한참 동안 당신의 과거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했던 이야기를 수백 번 반복하시지만, 나는 매번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고개를 끄덕인다.
사회복지사님은 가족도 친구도 못 알아보는데 김 순경님만 보면 저렇게 좋아하시니 참 희한한 일"이라며 웃으시지만, 나는 안다.
어르신에게 필요한 건 약보다도, 당신의 사라져 가는 삶의 조각들을 묵묵히 들어줄 누군가의 '귀'였음을 내가 들어드리는 이 20분의 이야기는 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지만,
어르신이 오늘 하루를 배회하지 않고 집 안에서 평온하게 보내실 수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예방책이 된다.
경계와 공감 사이, 마음의 빗장을 여는 법
누군가의 흩어진 기억을 붙잡아주는 일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잔뜩 날이 선 마음의 빗장을 열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 마을의 또 다른 이웃, 정신이상자분들을 마주할 때가 그렇다.
처음에는 나도 제복의 위엄으로 그들을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배운 것은 달랐다.
그들과 마주 앉아 눈을 맞추고, 그들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며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것. 위협적인 대상이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때,
비로소 사고의 뇌관은 제거된다. 법전을 외우는 것보다 그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먼저 읽어내는 것이 3 급지 경찰관에게 필요한 진짜 실력임을 깨닫는다.
보고서에 남지 않는 실적
경찰의 성과는 보통 숫자로 증명된다. 몇 명을 검거했는지, 과태료를 몇 건 부과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내가 오늘 한 일은 보고서에 남지 않는다.
치매 어르신이 길을 잃기 전에 먼저 찾아간 일, 마음이 아픈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소란의 가능성을 잠재운 일, 그리고 독거노인의 안부를 묻고 가스 밸브를 한 번 더 확인한 일.
이런 일들은 사고가 터지지 않았기에 '실적'이 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경찰이 일을 가장 잘했을 때,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다.
제복을 벗으며 생각하는 '평온'의 의미
퇴근길, 제복을 벗으며 오늘 올린 단출한 보고서를 본다. < 신고 없음, 특이사항 없음 > 이 여덟 글자를 적기 위해 오늘 내가 넘었던 수많은 문턱과 마주쳤던 눈동자들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해 보일지 모를 이 평온함이 사실은 수많은 정성과 예방의 손길 위에서 겨우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안다.
내일도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를 지키기 위해 다시 핸들을 잡을 것이다.
비록 알아주는 이 없어도, 아무 일 없던 하루'야말로 경찰인 내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