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에 가게를 가진 사장님들은 대부분 다른 일을 하던 분들이 많다. 예술가이던가 회사원이던가.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을지로에 새로 불어오는 마이너 문화, 폐허 속에 다시 지어지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이들이라던가. 근래 을지로 3가쪽이 본격적인 상권으로 변화하기 시작하긴 하지만, 적어도 이 곳에 들어왔던 개척자들은 대부분 그랬다. 가끔 이 곳 사장님들을 만나면 놀랄 때가 많은데, 취향로 3가의 사장님은 그림을 과 글을 좋아하시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이고, 마구간의 사장님은 원래 카지노 딜러 출신이지만 자신의 취향에만 온전히 이루어진 다락방 책방을 꾸미고 있다.
나의 경우, 아마 그 결이 비슷할지 다를지는 모르겠다. 인문학을 전공하고 마케터로서 또 브랜드 컨설턴트로서 10여 년을 보냈는데. 커리어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늘 나는 마케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는 을지로에 마케터가 들어왔다는 건, 상업화의 과정에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전문가가 들어왔다고 여겨질 수 있을지도.
사실 내 속사정은 조금 달랐는데, 아마도 내 커리어를 잘 살려 사업을 잘해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동안 해왔던 일에서 벗어나 또 다른 휴식을 갖기 위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엄연히 말해 큰 브랜드의 기업에서 마케터로 일해왔던 것은 거리라는 실제 필드에서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의 역할과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수록 다른 점들이 많다. 물론 시장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는 본질 측면에서는 기본적인 프로세스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내가 했던 마케터의 역할은 이런 것이었다. 기업에서 연봉을 받는 입장에 있으며, 또 대자본을 이용해 시장의 소비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에서의 크리에이티브를 사용한다. 비주얼, 영상, 음악, 글 무엇이든 크리에이터와 소통하여 결과물을 만들고 그것으로 고객의 감성을 움직여, 결과적으론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해 기여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프로페셔널한 마케터로서의 역할. 마케터는 기업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창의 역할을 하는 커뮤니케이터이자 이 과정에서 예술가들에게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경제력을 지지해주고 그들의 창의력을 통해 건조한 기업의 브랜드에 감성의 숨을 불어넣어준다.
다만. 여기에는 마케터로서의 고충들이 따른다. 돈을 기업에서 받는 입장이다 보니 어떻게든 소비자, 아티스트, 기업 모두를 설득해야 하지만 결국에는 기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 또한 크리에이티브를 활용하는 기획자로서, 또 시장을 움직이는 소비자의 대변자로서 가끔은 마케팅과 브랜드의 진정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케터는 크리에이터가 아닌 코디네이터로서의 역할이 충실해야 중립성을 지킬 수 있으며 아무래도 그 역할에 충실할 때 완성도 있는 결과물이 나타날 때가 많은데, 마케터 또한 사람인지라. 가끔은 감정적으로 흔들리거나 개인의 취향, 욕심에 따라 평정심을 잃는 일 또한 종종 발생한다.
알렉스룸이란 공간을 대중에게 오픈하기로 결정하던 시점, 나는 적어도 그동안 내가 잘 해왔던 역할들보다는 못 해왔던, 그리고 한 번쯤은 그 사이에 있는 중간자로서가 아닌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결과의 완성도에 연연하지 않고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건 기획자로서의 브랜딩 프로세스들을 가능한 과감하게 외면하고 공간의 창조자로서의 크리에이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취향과 시장성 사이의 밸런스에서 조금 더 개인적 일 수 있는.
요즘은 작은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들도 브랜딩의 기본 요소를 갖추는 것이 너무 능한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센스 있는 가게 이름을 짓고, 디자이너에게 가게 로고나 비주얼 체계를 맡기는 일이 놀랄 만큼 손쉬워졌으며, 자영업자들을 위한 바이럴 마케팅 회사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메이저 브랜드들의 체계적인 컨설팅을 오 년이나 했던 나로서 그런 일련의 브랜딩 프로세스를 모를 리가 없으나. 알렉스룸에는 그런 것들이 모두 배제되었다. 사업자 등록을 할 때 이름 때문에 잠시 고민하긴 했는데, 그냥 여긴 내가 만든 방이니 '알렉스룸'이라고 등록해버렸다. 심지어 영어 문법도 맞지 않았지만 - Alex's room 이어야 한다 - 역시 개의치 않았다. 가게 만들려면 로고는 있어야 하지 않냐며 자기한테 부탁하라는 디자이너 친구들도 몇 있었지만 그냥 네이버에 검색해서 금속 현판을 만들어주는 상점에서 주어진 폰트 내에서 선택하여 현판 두 개를 만들었다. 아이덴티티니 이런 것도 처음부터 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이걸 하고자 하는 뜻은 있어야겠다 싶어 manifesto 역할의 문구 하나를 만들었다. 'ignite your creative spark'
'ignite your creative spark'는 내가 알렉스룸을 만들게 된 이유를 함축하는 설명이자 또한 이곳을 스쳐갈 사람들에게 이렇게 한번 조금 더 노력해보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알렉스룸은 그래서 전기라던가 설비 등과 같은 도저히 내가 잠시 배워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내 손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스스로를 알렉스룸의 creator라고 칭할 수 있게 되었다. 다 만들고 나니 예전에 크리에이터 - 에이전시들을 괴롭히며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의 완성도를 만들고자 했던 결과물들에 비해. 솔직히 터무니없이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고 이래도 될까 싶은 면면들도 있지만, 부족한 대로 내 손으로 모든 걸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 팔이 떨어질 것 같이 닦아대도 여전히 더러운 창. 어설프기 그지없는 페인트 칠부터 해서 사실 돈을 더 쓸 수도 없어 동대문 시장에서 고르고 골랐던 커튼 천 등. 아마 월급 받고 일했으면 '이거 만들고 나 잘렸을지도 몰라' 싶었지만, 그래도 정말 누구에게 도움받지 않고 내 손에서 만들어진 내 새끼는 이런 거구나.
그리고 홍보. 홍보는 조금만 했다. 안 할 수는 없었는데 작가들에게 공간을 열어주고 전시회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있어야 전시를 공지하고 작가들을 소개하지. 매일 오픈하고 마감할 때 피드를 올리며 열심히 인스타만 팠는데, 아무래도 취향을 중심으로 사람을 모으기에는 인스타 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알렉스룸도 알음알음 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지금은, 이름은 다른 걸로 할 걸 하고 조금 후회하긴 한다. 아마 그게 조금 더 편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