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나올때 흘리지 않았던 눈물, 피렌체에서 흘렸다

그렇게 가고 싶던 도시의 밤길을 걸으며,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by 알렉스키드
지식으로 알아봐야, 경험으로 체득하지 못했다면 결국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즉, 어떠한 용기도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담'은 타고나지 않는다. 다만 단련될뿐.

그만큼 순수하고 정직한 요소가 또 없다.


눈물나게 혼나봐야 보고도 잘하고,

오해와 구설수에 올라봐야 왜 매너를 갖추고 몸가짐을 조심해야하는지 안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 애쓰다보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된다.

살면서보니 아무것도 안하는 만큼 하루를 죽이는 일이 또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는 것만큼 지루한 것은 또 없다

* 물론 사고없이 지나는 하루에 늘 감사하지만!


고민하는 시간은 충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지식과 경험이 수반될 때나 의미있을 터.

실행하면 결과를 얻게 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더 잘하는 사람들'과

경험과 과정에 대해 나누며 함께 커가는게 진짜 성장이다.


성장을 위한 최고의 보약은 이별이다. 내 삶의 전부였던 첫 직장과 그런 마음으로 이별했다.


최종 합격 통지를 받은 날,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는데 퇴사날은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10~20대의 나는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세상'에서

유유자적하며 스스로를 지키며 혼자 사는 삶을 누렸다면,


30대가 되면서(회사에 들어가면서)

처절하게 도전하고 깨지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 도전들 중 어떤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참 숨 가빴다.


회사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PT만 할수 없었다.

우아하게 커피 한잔하면서 자료도 만들고, 문서를 꾸미고, 회의하는 그런 삶은 없었다.


교육 전날 하루 종일(때로는 퇴근하고 가서) 교육장 세팅을 했어야하고,

교육 시간 직전까지 바뀌는 임원들의 좌석 배치/출석에 대해서 챙기고

교육이 시작되면 문을 닫고 1분이라도 늦은 사람은 차장이든 부장이든 돌려보내는


모든 일에 상처받는 인사팀 1년차의 삶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선배한테 정말 힘들다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땐 그게 쉽지 않았다. 다- 어렸으니까 우리 모두.



카페 갈 시간도 없어서 대학생때도 안먹던 편의점 코스로 매번 교육장 지하에서 배 채우던 시절. 서글퍼서 찍은 야근러.

네가 뭔데 시간내서 왔더니 교육장을 못들어가게하냐며 다른 부서 상사들에게 욕먹고,

너덜너덜하게 자리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포토샵 작업, 매거진을 만들고 교육 장표와 밀린 행정을 시작한다.


그렇게해서 매일 집에 늦게 들어가고,

주말 내내 회사에서 들었던 부정적 감정이 떠나지 않아

회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주말까지 괴로운 스트레스를 일년 반 달았더니,

더는 다니기 싫어졌다. 그래. 동기들 다 잘 다니는데

나만 힘든데는 뭔가 내게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패배자가 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선배님, 힘내세요!"라면서 인턴 직원이 찍어준 사진. 유일하게 내 사진을 찍고 얘기를 들어주던 착한 친구는 LG에 갔다. 삼성보단 그래도 LG가 편할 것 같다나.




좋은 기회로 2년이 채 되기 전에, 프로젝트 현업으로 옮겼지만

처음 보는 단어들의 향연, 공대 기반의 업무와

지금만큼의 유연성이나 적극성이 부족했던 나는

이제는 “직업인”으로서의 갈등을 시작했다.


* 지금처럼만 일을 할줄 알았다면,

내 일 알아서 꿰차면서 이겨냈겠지만


스스로를 무능하다 여기는 삶이 괴롭고,

언젠가 끌려갈 현장에 대한 불안감이 싫어서


내 발로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더 늦기전에. 아무것도 할수 없기 전에.


고민하는 시간은 사실 1년이 넘었지만,

너무나 쉽게.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을 건내고,

일사천리로 퇴사가 진행되어 예상보다 보름 일찍 퇴사하게 되었다.


퇴사하고 사무실을 나오던 날,

마지막 퇴근 셔틀버스를 타고, 배고파서 사둔 김밥을 꾸역 꾸역 먹으며 생각했다.



잠실행 8시 셔틀. 8시부터 5시까지 정상 근무인데, 내가 9시 이전 셔틀을 타본 건 몇번이던가. 파리한 형광등이 서글펐던.


뭐가 잘못된걸까?

그래. 나는 죗값을 치른거다.

10대 ~ 20대 시절 내가 누린 유유자적함이 나를 옭죈거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이른" 치열함이,

지금 내게 없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단단한 갑옷"을 입혀줬다는 느낌.


나에겐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상처를 매 순간 고스란히 받았고, 주도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맴돌았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버스를 탈지 말지도 결정 못하는 유약한 나에게,

회사의 많은 결정들은 너무나 큰 것들이었다.

감히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소심함. 바로 그 소심함이 문제였다.


퇴사날 삼성에서의 나는 죽었다는 의미로 검은 정장에 검은 타이를 매고 갔다



내 손으로 100% 완성했던 프로젝트 사무실. 검은 타이를 메고 모두가 퇴근한 바로 이곳에서 마지막 한장을.


그렇게 퇴사를 하고, 몸과 마음이 너무 아파서 한달은 꼬박 집에서 쉬었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만나서 하소연조차 하기 싫었다.

그냥, 일어나고 싶을때 일어나서 밥먹고 자고 익숙한 동네의 거리를 걷고 싶었다.


되게 편한 마음으로. 그냥.


대학 시절부터 꿈꿨던 유럽 여행,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마드리드로 들어가서, 밀라노에서 돌아오는 왕복 티켓을 샀고,

그저 레알마드리드 홈 티켓 2장, 로마 홈 티켓, 파리 생제르망 티켓, 첼시 티켓만 사서

경기 일정에 모든 동선을 맞추기로 하고 무작정 떠났다.


스트레스로 인해 피부도 엉망, 몸도 엉망이었지만 유럽에서 걷고 또 걸었다. 내가 살아있는 느낌을 느꼈달까.



그렇게 시작한 유럽 여행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시간이 더디지도 빠르지도 않게, 어릴적부터 TV에서 보던 다큐멘터리나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만화책, 대항해시대 게임에서 보던 보물들을 찾아다니며

어릴때 막연히 꿈꾸던 유럽 여행의 꿈을 나이 32살이 되어 이뤄낸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여행지인 이탈리아로 향했다.


32세 1월의 어느 밤,

생각보다 아름다운 도시 피렌체에 반했다.

피렌체를 떠나는 마지막 밤, 혼자 밤거리를 걸으며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을 마주했다.


아름다운만큼 서글픔도 많이 느꼈던 도시 피렌체. 내면의 상처가 조금씩 회복이 되던, 그 변곡점이었던 것으로 기억.


이렇게 멀리까지 내가 원하는 곳에 왔는데,

나를 완전히 감싸는 생각과 감정은 바로 이 것이었다.

지금 나는 아무 소속도 없고 내일 반갑게 인사할 사람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회사원이 되면서 기도해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반항감에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유럽에서 처음으로 기도를 했던 것 같다.

누구보다 간절히, 뼈에 사무치도록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렇게 나의 상처를 직면한 유럽에서 돌아와서,

나는 다시 취업을 위해 시장에 뛰어 들었다.


수많은 경력 면접의 낙방을 거쳐, 그만둔지 1년 뒤인 33세에 지금의 회사에 들어와서

좋은 인연들을 만났고, 35세엔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만큼 힘들었지만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일년만에 많은 성장을 얻게해준 팀장도 만났다.


이제 난, 나이가 드는 것이 즐겁다. 정말.


잃을 것이 많아 도전하기 힘들다고 늘 읊조렸지만,

오히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더 신중히, 묵직하게 도전하게 되는 법을 배웠고,

천천히 가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부모님이 주신 무언가가 아닌, 나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 때, 내 모든 걸 걸고 그만둘 수 있었던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


밀라노에서집으로 돌아가는 길. 굿윌헌팅에서 한참 눈물 흘리고 난 다음날 전철에서 창 밖을 보는 윌의 모습이 겹쳐졌다.


돌아가도 그만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현명한 결정이 내 인생의 방향을 지금만큼 잘 바꿔놓으리라는 확신은 여전하다.


그 눈물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나의 가치를 묵묵히 좇자.

모든 젊음의 결정을 응원하는 아저씨가 되어가자. 든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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