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레 삶에 녹아든 업무의 연장선들. 어찌 칼로 베듯 삶과 나누겠는가.
누군가가 정해놓은 사이클에 맞춰
하루를 보내는 직장인의 삶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애써 부인하지 않는 습관을 키우고 있다
뭐랄까. 사회 초년생 때 그렇게 내가 분통을 터뜨리던 것들에 대해서
조금은 누그러졌거나, 혹은 타협했거나-
* 그도 아니면 꼰대가 되었다는 신호를 발견했거나.
'누군가가 정해놓은 하루'를 사는 것,
불행한가? 글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유치원, 초중고교, 남자의 경우 군대까지
어느 하나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면서 온전한 하루를 내 뜻대로
"연" 단위로 나의 계획에 맞는 하루들을 보낸 기억이 있던가?
사실 대학 시절을 제외하면,
우리는 늘 평생 누군가가 짜주는 일과에 맞는 삶을 살았다.
내가 공부한 만큼 대학을 갈 수 있고,
그 대학 안에서 원하는 과목을 수강 신청한다.
(그마저도, 필수 전공과목은 사실상 내가 고르는 게 아니다!)
강의를 듣거나 빠지거나는 내 선택이고, 그에 대한 결과도 내 몫이다.
그리고 열심히 입사 준비를 해서,
나를 "뽑아주는" 회사에 들어가게 되고,
우리는 아홉 시부터 여섯 시(혹은 그 이전부터 이후까지),
고용주(혹은 고객)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게 된다*
회사원이 되면 잠시 효자가 된다.
이렇게 고생해서 날 키워주신 아빠에게 마음으로 나마.
사회 초년생 때는 일하다가 창 밖을 보면 참 우울했다.
저 예쁜 벚꽃을 지금 보러 나가고 싶은데, 나는 사원증을 메고 복사를 하고 있으니
내 마음대로 삶의 한 부분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랄까- 그땐 그랬다.
신입 때는 몇 시에 퇴근할지 종 잡을 수가 없어,
평일 약속을 전혀 잡을 수가 없었는데 가끔 일찍 끝나면
회식으로 끌려가니 워라밸이라는 단어에 그렇게 목을 매게 되더라.
그렇게 13년 정도 되는 사회생활을 견뎌낸 지금.
이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자연스럽지 않으면 아마 지금 이 순간도 난 괴로웠으리라.
가령, 자고 일어났을 때
오늘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이 문득 떠오르는 건 더 이상 어색한 일이 아니다.
오늘 내로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빨리 잘 처리할지 미리 고민해 두는 게
어떤 면에선 효율적이라는 태도를 9년 차 정도부터 갖게 되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워라밸을 위한 하루 계획은,
출근길 전철에서 대부분 이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 두 명 등원
출근길 전철에서 업무 우선순위와 문서 방향을 계획
도착하자마자 아이디어를 A4 용지에 러프하게 작성
한글/PPT 문서로 뚝딱 만들어서 점심 이후 2시에 팀장님 보고
팀장님 피드백을 받아 4시까지 최종본을 작성하여, 재차 보고
확정된 계획안을 5반까지 메일로 전달하고, 잔업 정리
6시에 팀장님, 부서원들께 인사하고 퇴근
이렇게 하루를 보내야, 여섯 시에 퇴근할 수 있다는 것.
만약, "워라밸이 중요하다며"
출근길에 '회사 생각을 안 하기로 고집'했다면,
6시 퇴근은 8시 퇴근 정도로 밀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어떤 쪽이 워라밸을 쟁취해 낸 걸까? 정답은 간단하다.
대부분 자고 일어났을 땐 부정적인 "감정"을 담은
에피소드 같은 비생산적인 것들이 떠오르는데,
그런 감정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하루에 대한 계획이 더 생산적*이다.
* 생산적으로 일을 하는데 목메자는 뜻은 아니고,
빨리 일을 끝내야 퇴근하면서 재테크 고민도 하고, 책도 읽는다는 생산성.
목가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은 시인이나, 농부들도
동이 튼 순간부터 치열하게 하루의 고민을 하며 산다.
시인은 오늘 하루 어떤 문장을,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고,
농부는 해가 지기 전에 어디까지 밭을 갈지 고민한다.
직업인으로서 세상을 사는 그 누구도,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마 그 자유가 사라지는 순간 무엇보다 큰 허무가 느껴지지 않을까.
첫 회사를 퇴사하고 이틀 뒤,
교대 운동장에 앉아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를 느끼던 32살엔
허무함 반 자유로움 반이었다.
아마 20년 뒤 다시 저 상황에 놓이게 되면?
과연 자유로움이 얼마나 남게 될까, 내게.
워라밸.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특히나 힘든 문제다.
나도 그랬다. 주말에도 떠오르는 회사 생각에 잠이 안 왔다.
그러나 지금 와서 냉정히 생각해 보면
회사일에 대한 고민보다, 회사에서 벌어진 부정적인 감정의 기억들 때문에
내가 힘들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빨리 일을 끝내겠다, 잘 마치고 퇴근하겠다는 생각보단
그저 "회사"가 주는 부정적 감정에 눈이 가려지다 보니
워라밸을 엄한 곳에서 자꾸 찾으려 애썼던 것 같다는 생각.
조금만 숨 고르기를 해보자.
우선 일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그 범위가 넓어지면 직장이라는 남의 일을 넘어
나만의 일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겠지. 어쩔 수 없다.
효율성을 키우고, 남의 일을 빨리 끝내야
의 일을 찾고 거기에 집중하는 순간이 온다.
요즘은 정말이지,
이렇게나 생각할게 많으니 누구랑 대화할 시간이 부족하다.
머릿속의 생각이 정리되는 대화가 있는데,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찾는 에너지나
혼자 고스란히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쓰는 에너지나
사실 에너지 총량은 거의 같다.
이제는 공감을 위한 넋두리에 에너지를 쓰지 않고,
오롯이 내 삶의 온전한 성장을 위해 집중하고 있다.
빨리 퇴근하기 위해서 짬을 내어 일을 고민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온전히 나와 가족을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것.
워라밸을 위해서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조금만 양보해 보자.
언젠가는 이런 고민도 그리워질 순간이 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