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남자의 삶을 장악한 풋볼 셔츠, 레플의 세계
유니폼 몇 벌 있으세요?
과거 유행했던 '햄최몇(햄버거 최대 몇개?)' 같은 질문이긴한데,
50벌 넘어간 이후로는 세본 적 없는 것 같다.
축구 셔츠(레플이라 부르는)에 대해선 할말이 많지만,
전문의 영역으로 가면 너무 4차원으로 가기 때문에 각설하고
언제부터 내가 레플을 입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돌아보면
94 미국 월드컵, 새벽마다 일어나서 챙겨보던 이탈리아의 경기,
"말총머리" 로베르트 바죠가 골을 넣고 환호하던 장면을 보며
하얗고 파란 셔츠,
흩날리며 달리는 카라의 그 멋짐을 본 순간부터
아마 나도 저 옷을 입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제부터 축구옷을 샀는가?
대부분의 초등학생들이 그렇듯,
나도 미국 월드컵을 본 뒤로 바죠, 클린스만, 호마리우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축구공과 축구화를 사서 친구들과 축구를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98프랑스 월드컵, 유로 2000을 보면서 성장했고
마침내 2003년, '레알과 유벤투스의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경기가 끝나고
유벤투스가 은하수 군단을 잡고 결승에 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저 셔츠는 사야겠다."
02-03 유벤투스 홈 "델피에로" 셔츠를 사면서 나의 레플 입문이 시작되었다.
지구방위대, 갈락티코 레알을 무너뜨리는 델피에로의 셔츠를 입으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기적은 없으리라는 '굉장히 동화같은 힘'을 얻게 되었고,
그렇게 Hero들의 셔츠를 한두벌씩 챙기면서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
축구옷을 근데 왜 입는가?
상술했듯, 히어로 물의 생활화랄까.
좋아하는 구단, 선수의 옷을 일상복으로 맞춰 입으면 약간 "뿌듯"한 것이 있다.
어린이들이 번개맨 티셔츠도 입고, 아이언맨 옷 입고 다니지 않나?
그것의 성장판이라고 보면 굉장히 쉽다.
특히 내가 옷을 좋아하는 것과 완전 별개일수는 없는 것이,
이게 청바지의 캐주얼보다는 슬랙스/치노와의 조합이 은근히 꿀조합이라..
이전 회사에선 워낙에 옷에 대한 간섭이 많아서 가끔 입었는데,
지금 회사는 보다 자유롭고 '캐주얼 데이'도 오피셜하게 있던 곳이라
금요일마다 위트를 갖추는 의미로 축구 셔츠를 챙겨 입어왔다.
사실 이거 제법 돈 많이 든다.
레플리카 정발이 기본 10만원에,
마킹 4만원, 패치 2만원(챔스 패치를 붙이면 가격은 산으로!) 등등
대략.. 풀세트로 맞추면 20만원에 육박하는 고급취미인지라
* 어차피 여성분들이 보시기엔 "아 저 사람 축구하러가나"로 귀결되지만.
사회인이 되고나서는 호날두(느그형)에 완전히 꽂혀서는,
포르투갈 선수용 져지도 제법 모았고 레알마드리드의 매 시즌 홈은
무조건 그의 이름을 밖았던 것 같다.
번외편으로 벤제마, 알론소를 몇벌 샀는데 이젠 그것밖에 못 입는다
우리형 상암에서 왜그랬어 진짜 ;ㅁ;
마킹이 또 은근 습기와의 전쟁, 희소성과의 전쟁이다!
옷걸이에 걸어뒀다가 마킹이 녹아서 다른 셔츠에 붙어버리기도 하고,
갈라져버리기 시작하면 탈착도 어렵고 새로운 마킹을 구하기도 힘들다.
더군다가 상술한 바와 같이 나는 "그녀석"의 셔츠가 너무 많아서,
이제는 입고다니지도 못하고 뜯기도 힘든데, 뜯어봐야 그 시즌의 다른 선수 마킹 구하기도 힘들다
내 돈 주고 샀는데 이런 고통이 있나 정말
아. 이정도면 정말 지나가는 축구옷 입은 아저씨들 리스펙 한번씩 해주자 눈물이 날 것 같다!!
레플을 넘어서 이젠 스타일에 있어서 과감함을 찾게 된다.
추울 때는 클럽의 스카프를 두르고, 셔츠 입을때는 타이로 메고,
사실 반지도 굉장히 사고 싶어서 연말마다 clearance sale 기간에 눈여겨보는데,
할인도 잘 안하고 손가락 사이즈도 맞추기 부담스러워서 늘 패스
EPL 쪽이 구단에서 자체 제작하는 타이가 참 예쁜게 많은데,
올해 말에는 꼭 몇개 구입할까 한다.
요즘은 레플을 활용한 데스크테리어로 확장했다
회사에 입고 올 수 있는 건 금요일 하루 뿐,
그나마도 외부 미팅이나 행사가 있으면 거르게 된다.
즐거운 금요일의 위트가 사라지는 순간이 아쉬워서
고심하던 차에 사무실 자리를 꾸미는 것으로 결정했다.
월요일에 걸어두고, 금요일 퇴근하면서 집에 챙겨간다.
그리고 새로운 주의 월요일에 새로운 셔츠를 걸면서 한주에 의미를 부여-
이정도만 숨통이 트여도,
뭔가 나의 정체성을 사무실에서 찾을 수 있다는 기분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것, 그거 하나만으로도 레플은 내게 최선을 다해주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새벽까지 축구를 보고,
벌건 눈으로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한참이나 떠들면서
반 페르시 슛 봤냐,
모드리치 탈압박 죽이더라,
알론소가 중원 다 씹어먹더라 이런 얘기로 하루를 보내는 일상은 이제 먼 얘기가 됐지만-
그래도 아직 소년처럼 뜨거움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내가 아직도 레플을 사랑하는 것이 위로가 된다.
앞으로도 창고속에 잘 보관중인 소중한 레플들을,
가끔씩 꺼내주고 걸어주고 입어 줘야지-
10대부터 쭉 함께 해 온 나의 레전드 셔츠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소년은 영원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