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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류 대기업, 업계 최고 계열사에 합격을 해버렸다

20대의 간절한 꿈, 화려한 성취는 40대인 내게 아직도 보탬이 된다..

by 알렉스키드

2010년 여름, 4학년 4학기를 맞이하며 본격적인 취업 시즌이 열렸다.


당시에 가장 핫하던 업계가 있었고, 업계를 주도하는 대기업들은

해마다 신입사원들의 연봉을 경쟁하듯 올려, 당대의 최고 우수 인재를 쓸어 담고 있었다.


금융권. 컨설팅펌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이 업계 천하였다.

대기업에 들어가는 인재 중 제일 학벌 좋고 똑똑하고 괴물 스펙을 가진 녀석들이 가는 곳.


그래서 나도 대기업은 해당 업계만 썼다.
옷을 좋아하니 패션, 홈쇼핑 쪽도 생각해 봤지만
첫 도전인데 "센 놈들"에게 도전해보자는 그런 생각


지금도 후배들이 물어보면 대답해주는 말인데,

"일단 다 쓰고 봐"가 나의 철학이다. 어떤 패를 던질지 모르겠으면 가장 센 패에 도전해야 현실 자각도 되고, “와 거기 썼었냐? 담력도 좋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만큼 도전정신 하나는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말 그대로 “졌잘싸”가 가능하다!)


그렇게해서 해당 업계에 몸담고 있던 삼성의 계열사를 지원했다. SSAT 시험을 치르고 나와서.. 예배에 갔던가? 그러고보면 지금 회사 입사 시험 때나 삼성 때나 시험장을 나오며 드는 공통적인 생각은 이거였다.


망했네 시간 아깝다


어찌됐든 다른 원서들도 기다리고 있고, 열심히 자소서를 써 내려가며 중간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1차 발표 합격 통지를 받았고, 이제 스터디를 하냐 혼자 준비를 하냐의 기로에 놓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괴롭히는 못된 심보가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모여봐야 남는 것 없다”는 마음이라,
그 흔한 스터디도 안 들어가고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원래도 말을 좋아해서 PT는 자신 있었고(심지어 더 잘하고 싶어서 졸업 전 두 학기는 발표만 세번씩 하는 강의도 몇 개씩 들었다. 두 학기 동안 열세 번 발표했더라. 그만큼 적당히 오만할만큼 자신이 있었다!), 좋아하는 과목인 마케팅, 물류 쪽 지식과 뉴스 위주로 준비를 했다. 더 이상 준비할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면접 전날, 교회오빠였던 나는 여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사옥에 가서 일곱 바퀴를 도는-(성경에선 성이 무너진다) 기도를 하며, 나름의 정신무장을 했던 것 같다


이번엔 다르다 승리를 할 때가 왔다
무모한 도전이 의미가 있으려면 붙어야 한다
내가 붙는다 승리만 남는다 내가 이긴다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들끓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여긴 내가 나온 고등학교 근처고, 우리 집에서 걸어서 십 분밖에 안 되는 나의 홈그라운드 아닌가? 이런 작은 것들조차 운명의 태엽이 맞는 것처럼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초조함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언더독"임을 인정하자. 그러나 "치열하지 않고 유려한" 도전자가 되자.


바꿀수 없는 조건은 날 언더독으로 만들지만 살아오며 준비한 다른 것들로는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신발끈을 꽉 묶고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일만 남았다.
내일은 내 합격의 날이다.
이번엔 다르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나는 깊은 잠에 들었고, 다음날 정갈한 정장을 입고 회사까지 걸어갔다. 편의점에서 산 도마슈노를 한 잔 마시면서.


비장하기보다는 즐거웠다. 수능도 편입도 마지막 순간에 로베르트 바죠처럼 고개를 떨궜지만 먹었지만 이번엔 다르리라는 기대감이 솟구쳤다.


예전부터 가장 높은 것에 도전하는 겁 없는 내 태도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용기가 되어주었다.


면접장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이 안돼서 면접 대기장에 갈 수 있었다. 자리가 마땅히 없어 보니까 딱 한자리가 남아서 대기자에게 물어봤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자리에 앉아보니 열심히 스터디를 한 친구더라. 이것저것 보여주면서 이런거 아셔야 한다는데, 이미 눈에 들여놓을 마음은 없어서 마음만 감사히 받고 면접 잘 보시라고 했다.


면접, 정말 잘 봤다!


압박도 있었지만 수백 명이 듣는 대강의실의 PT 수업을 하면서 경영학과 대표 교수에게 수도 없이 지적을 당해본 담이 있어, 웃으면서 재치로 넘길 수 있었다.


인생은 핑크빛 문이 아니다. 무겁도 둔탁한 철문보다 더 어둡다. 다만 문 너머에 마주치는 어떤 것을 어떻게 대할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난 “제일 잘하는 놈”이 되기로 결정했다.


운명의 조력자 하나,
임원 면접 대기 중 만난 선배

스터디를 안 한 나는 자기소개 같은 것이 준비가 아예 안된 상태였다. 임원 면접을 향해 올라가서 대기중인 내게, 면접 운영을 도와주던 선배가 물었다.


“L님, 혹시 짧은 자기소개 준비 하셨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아 그래요? 지금 임원분들께서 종일 면접 보셔서 피곤하신 상황일텐데, 저 같으면 간단하게 재치있는 인사를 하시면 좀 더 좋은 인식을 주실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정말 큰 도움을 줬다.


그의 조언을 듣고 10초도 안돼서 바로 입장했는데, 허리를 쫙 펴고 무릎에 힘을 주고 전방을 주시하는 모델 워킹을 하는 3초를 포함, 총 13초만에 내 인생을 바꿀 멘트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안녕하십니까. 눈에 보이시는 훤칠한 키만큼
삼성00의 가장 단단한 기둥이 될
수험번호 000번, L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만들어내기 어려운 멘트를 웃으며 당당히 날렸고, 세분의 임원이 동시에 빵 터지는 모습을 보며 100m 달리기의 초반 스퍼트는 성공했다.


운명의 조력자 둘,
대기장에서 만났던 면접경쟁자(!)


심지어 정말 내가 될 놈이었는지, 마지막 단체 면접 때 아까 대기장에서 본 그 여학생이 맞은 편에 앉아있었고, 면접관의 그녀를 향한 마지막 질문이 내게 팡파르를 울려주었다!


“A씨,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건너편에
앉은 면접자 아무한테나 칭찬 하나 해주세요.”


와 이거 대박이다!! 이거다!!

말해 말하라고 나 기억나잖아 제발!!

같이 올라가자 드라마처럼!!!!!


이윽고 그녀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이름표를 쓱 보더니 나와 아이컨택 후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는 건너편의 L님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오늘 처음 뵀는데 대기장에서 긴장 풀게
말도 먼저 걸어주시고...


예쓰! 예쓰! 예쓰!!


귀에 걸리는 입꼬리를 열심히 내리 누르며, 면접용 웃음으로 그 자리를 마무리한 나는 진정한 승자였다


그날 만난 모든 것이 날 도와줬다. 우연은 기회를 기회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본인의 인생으로 끌어당겨오는 자에게 승리의 미소를 준다. 이번 기회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단체면접을 끝으로 나와서 함께 면접 본 사람들과 정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잠시 집까지 걸으면서 생각했다.


뭐랄까 인생을 살아온 축적된 가치들이 발현된 느낌이었다. 살아오면서 인정 받지 못한 인성, 매너,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 등을 모조리-
그것도 가장 한국에서 저명한 평가자들에게!


원래 매너를 중시하고 사람들 앞에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단체면접에서 주효했고, 다른 업종을 준비하면서 공부해둔 물류 관련 지식(자산은 어떻게 모으냐보다 어떻게 쓰냐가 중요하다, 늘)과 어른들 앞에서의 언행 등 이런 것들이 빛을 발한 것 같은 느낌.


품위 있게 살고 싶었다. 싸구려 안주를 먹으며 농이나 던지는 시시한 인생들말고, 잘 차려입고 건강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런. 그런 삶에 다가서니 내 인생의 결정이 옳았다는 감사를 느꼈다.


그렇게 다져온 내 인생을, 스스로 멋지게 증명해냈다는 생각에 미치자, 생에 처음 짓는 것만 같이 가슴이 뭉클한,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양재천 다리를 건넜다.

참, 석양이 예쁘더라
아직도 그 따스한 기운,
눈을 감고 노을을 향해 웃음짓던
그때의 내가 기억난다


집에 가면서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해야할 것 같았다. 너무 잘 했으니까 내가.


원래 아빠랑 말을 많이 하지도 않고, 아빠도 전형적인 무뚝뚝한 회사원 말투로 전화를 받으셨다.

아빠 면접 잘 봤어.” 로 시작해서 어떻게 인사했고 어떤 질문이 왔는데 이렇게 대답했고, 이런 단점을 지적했는데 이런 보완점으로 대답했고 등등..


어린 아이처럼 한참을 얘기했는데


아빠가 나랑 통화하면서 그렇게 크게 좋아하면서 웃는 것은 처음 봤다. “아 그렇지 그렇지” “아 정말 잘했네 하하하”하면서 웃으시는데 정말이지 나도 신이 나서 미치겠더라!!!


늘 내 걱정만 하시던 부모님인데,

이렇게 큰 웃음을 드릴수있다는게 감사했다

그래. 설레발은 필패지만 이건 다르다.


승자에게 비취는 하늘의 미소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노을이 저 멀리서 지고 있었고 중고대학 시절 내내 한숨만 쉬던 이곳에서 나의 당당한 트로피 대관식이 기다리고있었다!!


설레는 마음을 감추며 며칠을 보냈고,

마침내 결과보고 발표일이 왔고 나는 학교 전산실에서 합격 소식을 확인했다.


부모님께 전화드리고, 다음 강의에 들어가서 교수님께(퇴직을 앞둔 노교수님, 크게 친하거나 하진 않았음) “교수님 저 취직했어요”라고 말씀 드리니까


어이구 잘했다 잘했어 제일 큰 효도야

라고 연신 말씀하시면서 190이 넘는 이 거구를 그분의 마르고 야윈 두 팔로 꼭 안아주셨다. 참 따뜻하다고 느꼈다. 교직을 떠나는 마지막 강의에서 대기업 합격한 제자가 있다는 그 뭉클함은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그동안 쌓였던 서러움 같은 것이 터져서는 눈물이 엄청 흘렀다. 경복궁역에서 거의 옥수까지는 울었던 것 같다. 무슨 사연있는 남자처럼. 그래도 괜찮다.


난 성공했으니까.


더이상 내 소속이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니까.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내 손으로 뭔가 크게 이뤄내 인정을 받았으니까.

꿈도 못 꾸던 먼 발치의 삶을 내 두 손으로 강하게 움켜줬으니까!


동아리후배들이 “이야 삼성맨 오셨다”라며 반겨주는 것도 즐거웠고(원래 난 칭찬을 싫어했다. 자존감이 낮아, 괜히 힘내라는- 허공에 흩날리는 그런 의미없는 말 같아서) 먼저 취직한 친구와 선배들이 진짜 좋은데 들어갔다 부럽다며(특히 전자에 다니는 엄친아 형님이 크게 부러워하더라) 축하해줄때는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단지 소속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내가 나를 보는 눈 그리고 남이 나를 보는 눈에 대한 관대함과 자신감이 생겼다. 무한하게.


이 모든 행복을 고스란히 등에 업고,

나는 커리어에 늘 큰 보탬이 되는 삼성맨이 되었다.


내가 후배들에게 늘 해주는 말은 한결같다.

남보다 네가 나은 부분이 있다. 그걸 꼭 찾아라

가장 잘 나가는 업종의 회사를 두개이상 써라. 면접까지만 갔어도 분명 얻는 것이 많다.

대학만큼, 어쩌면 더 큰 영향을 주는게 첫 직장이다. 생을 바꿀 각오로 자소서에 영혼을 담아라.

삶이 고되고 힘들 때,

치열하게 준비해서 얻어낸 가장 뛰어난 성과를 그려본다. 세월이 10년이 지났어도 언제나 그 가치는, 그 훈장은 내게 큰 힘을 준다. 지금은 힘들지만 당신의 인생과 성과로 얻어낸 그 성취를 굳게 그리며 나가보자.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해,

나는 당신의 미래를 더 밝게 열어줄 수 있는

생의 가장 큰 결심을 내리고자 한다.


Go get it, d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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